충무공 이순신 > 이순신 리더쉽
관리자
2020-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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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출전 - 부산포 해전
1592년 8월 24일 (辛亥). 맑다. 신시(申時 :
오후 4시경)에 출발하여 노를 재촉하여 노량
(露梁) 뒷 바다에 이르러 닻을 내렸다.
삼경(三更 : 자정)에 달빛을 이용하여 배를 몰아
사천의 모사랑포(毛思郞浦 : 읍남면 주문리)에
이르니 동녘이 벌써 밝아왔다. 그러나 새벽
안개가 사방으로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8월24일 출전하여 9월2일까지 8일간의 부산포
해전은 임진년의 제4차 출전으로 장림포, 다대포,
부산포 등 왜적들의 병참기지 본부를 공격하여
적선 135척을 부수고 불태우는 큰 성과를 올립니다.
선단을 숨겨놓고 미리 탐망선을 보내어 함대가
부산쪽으로 나갔을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점들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한 조치로 함대는 적의 눈에
띄지 않도록 밤에 이동 했습니다.
7월8일의 한산대첩이 끝난 후에 "조선수군과는
절대로 맞붙어 싸우지 말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위축되어 있던 왜적들은 어쩔 수 없이
부산포 앞바다에 있는 수송선단으로 조선수군과
싸워야했습니다.
왜적들은 "조선수군의 부산포 공격에 대비하고
적의 공격시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라." 는 히데요시 정권의 실세인
이시다 미쓰나리의 명령에 따라 싸움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장사진으로 돌격하며 판옥선과
거북선은 군함 퍼레이드를 하는 것처럼 부산포에
틀어박혀 있는 왜적선들을 차례차례 깨트리기
시작 하였습니다.
이에 놀란 부산 주둔군 사령관 하시바 히데카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이자 양자)는 해전이
끝난지 여러 날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무시무시
했던 부산포해전의 악몽을 떨쳐내지 못하고 조선
수군의 위용에 짓눌려 병을 얻어 부산에서 죽었습니다.
이렇듯 함대를 언제 이동할 것인지 어떤 작전으로
공격할 것인지를 늘 염두에 두고 한 번도 같은
전략과 전술로서 왜적을 상대하지 않았던 이순신은
내가 이길 수 있는 조건은 적에게 있다는 것을 잘
파악하고 신중하게 움직였습니다.
언제나 게임의 룰을 바꾸어 싸우고 싶은 시간에
싸우고 싶은 장소에서 싸우고 싶은 전법으로 왜적
들을 번번히 따돌리며 승리를 거두고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했습니다. 밤에 조용히 나의 함대를
이동 시키는 것은 곧 나의 경쟁력이며 예나 지금
이나 다를 바 없는 승리의 조건입니다.
글 이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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