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 이순신 리더쉽
관리자
2020-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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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군산도(古群山島)에 이르니.....
1597년 9월 21일(戊申). 맑다. 일찍 떠나 고군산도
(古群山島 : 옥구군 목면 선유도)에 이르니 호남
순찰사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배를 타고 급히
옥구(㓇溝)로 갔다고 하였다.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명량해전에서 참패한 왜군은 서해안을 돌아 북진
하려고 했던 서진 전략이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판단
하여 결국은 서울 직전까지 진격한 왜육군들은 남쪽
으로 철수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편 이순신 장군과 조선수군은 명량해전이 끝나자
곧바로 당사도(唐笥島)를 거쳐 17일에는 어외도
(於外島)로 옮겼고, 19일에는 법성포(法聖浦)를 거쳐
다음날 부안 앞바다의 위도(蝟島)에 잠시 머물렀다가
21일에는 고군산도(古群山島)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12일간 머물렀다가 다시 남하하여 고하도
(高下島)에 도착하여 수군 재건기지를 구축하였는데
이는 서남해 해안 일대에 조선수군의 건재를 대내외에
알리고 수군 재건을 위한 병력 모집 및 군량 확보을
위해서였다고 파악되고 있습니다.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 간양록이라는 피난일기를
남기신 수은 강항(姜沆)이 9월 23일 전남 영광에서
잡히신 것을 보면 왜적들은 무안까지 올라와서
이순신의 함대를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
합니다.
이런 상황들을 종합해 볼 때 이순신 장군은 명량
해전이 끝난 후에 어디로 갈것인가 하는 것까지
염두에 두셨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무작정 서해안을
따라 후퇴하신 것만은 아닌것 같습니다.
나의 약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그래서 신속하게
후퇴할 수 있는 작전은 차기 전투를 준비하는 밑거름
으로 충분히 활용 되도록 치밀하게 계산된 전략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에 탄복을 금할 수 없습니다.
1594년 9월 3일 일기에,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셨는데, 지기지피
백전불태(知己知彼 百戰不殆)를 실천하신 서해안
대장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우리 기업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코로나19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먼저 자기
성찰을 하라는 지피지기가 아닌 지기지피로 바꾸어
쓰신 이유를 알것 같습니다.
글 이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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