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 이순신 리더쉽
관리자
2020-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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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포 왜성...
1594년 9월 28일(癸卯). 흐리다. 새벽에 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서 적을 치는 일로 길흉을 점쳐
보았더니 매우 길하다. 흉도(胸島 : 거제도) 안
바다에 진을 쳤다.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처음에는 "如弓得箭여궁득전 : 활이 화살을 얻는
것과 같다." 두 번째는 "如山不動여산부동 : 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의 괘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장문포 해전의 결과를 보면 이번의 점은
별로 잘 맞은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산대첩에서 거의 전멸하다시피 패한 일본 수군
에게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내년 봄 내가 조선으로
건너가 직접 조선군을 격파할 것이니 그때까지
해전을 중지하고 거제도에 성을 쌓아 주둔하라.
(중략) 조선수군에게 먼저 전투를 걸지 말라." 고
지시하였습니다.
장문포 왜성은 왜군이 한산대첩에서 패한 직후
거제도 북쪽에 영등포 왜성을 시작으로 송진포
왜성, 장문포 왜성 등 3개의 왜성을 쌓았는데
왜군들의 남해안 최전방이 되었습니다.
제7차 출전인 장문포 해전은 9월27일부터 10월
8일까지 제대로 공격도 해 보지 못한 수륙합동
작전으로 비변사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취소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도체찰사로 임명된
윤두수의 계획에 의해 이미 시작었습니다.
조선은 의병장 김덕령과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
들과 충청병사 선거이의 공격지원부대 그리고
이순신과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힘을 합하여
장문포 앞바다로 진격하였습니다.
그러나 왜군들은 장문포 왜성에 틀어박혀 조금도
항전하려고 하지 않고 험난한 고지에서 칼만 휘두를뿐.....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한 채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명나라와 화친을 의논하는 중이니
서로 싸울 수 없다는 패문을 꽂아 놓고 응전하지 않고
양쪽 봉우리에 벽루를 쌓고는 농성만 하고 있었습니다.
장문포 해전에서 볼 수 있듯이 윤두수 개인의 열열한
충성심만으로는 무모한 전투를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한바탕 싸워서 이긴다면 그것은 하늘의 신령이
도운 것이고 설사 이기지 못하더라도 오히려 종묘와
사직 앞에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라는 치기어린
계획이 성공 할 수 없다는 것은 쉽게 예상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핵심 지도자는 국가의
전체를 볼 수 있는 대의에 마음을 두고 백성의 안위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생존의 전략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요?
전투마다 점을 치며 기도를 하며 부하들과 함께 생사의
현장에 나서는 이순신은, 전쟁은 사느냐 죽느냐의 싸움
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글 이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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