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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의 의병대장 정문부!!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0-10-05

조회 16,411



함경도의 의병대장 정문부!!

선조수정실록(1592년 10월)
북도의 평사 정문부(鄭文孚)가 길주에서 적군을
크게 패배 시키고 길주성을 포위 하였다. (중략)
"이제 왜적을 치려고 하는 판에 나라를 배반한
역적이 아직도 진중에 있으니 그것부터 먼저 치지
않을 수 없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국세필(鞠世弼)
등 13명을 붙잡아 목을 베어 조리를 돌리면서
말하기를 "애당초 앞장서서 들고 나온 자는
이자들뿐이고 이밖에는 가담한자가 없다.  고을
사람들은 의심을 품지말라." 라고 하니 모두 다
기뻐하였다.  (중략)
회령의 유생 신세준(申世俊)이 군사를 일으켜
국경인(鞠景仁)의 목을 베었으며, 그 밖의 진들도
다 회복되었다. 난민들은 처단되기도 하고 도망
가기도 하였다.  문부가 고참(古站)역까지 부대를
이끌고 가서 군사를 시켜 명천(明川)의 역적 정말수
(鄭末守)를 처단하고 그 성을 회복하였다. (후략)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왜군들이 함경도로 들어가자 회령의 아전 국경인,
국세필 등이 나라를 배반하여 왜적의 제2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와
수행하는 대신들을 넘겨주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북평사 정문부가 의병을 일으켜 반란군을
진압하고 함경도 전체를 되찾았습니다.
28,000명의 가토군은 조총으로 맞섰지만 조선은
의병으로 구성된 3,800명의 기병대로 길주 부근
에서 연전연승 하였습니다.

1592년10월20일 ~ 1593년2월28일까지 경성전투,
장평전투(석정령전투), 단천전투, 백탑교전투 등 
모두 조선군의 승리로 장식한 북관대첩은 왜군의
사망자가 8,846명 이나 되는 큰 전투였습니다.

북관은 함경도의 다른 이름입니다.  북관대첩비는
의병장 정문부가 왜군을 격퇴한 전공을 기념하고 
기록한 전승비로서 1708년 숙종 임금 때 길주에
세워졌는데 1905년 러.일전쟁때 그곳에 주둔했던
일본군 이케다 소장이 전리품으로 일본으로 가져가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되었습니다.

그 후 1909년 조선인 유학생 조소앙 선생이 발견
하였고 1978년부터 시작한 한국과 북한 그리고
일본의 민간외교로 반환받아 2005년 10월, 약
100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지금은
원소재지인 함경도 길주에 복원되어 있습니다.

정문부 장군은 광해군 시대에는 북인(北人)들의
난정(亂政)에 통탄해 관직에 나가지 않았으며,
인조시대에는 이괄의 난에 연루가 되었다하여
고문을 받다가 죽었습니다.  후에 신원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관직생활을 하면서 모함을 받았거나 갈등이 일어났을
때 잘 해결하려고 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요구됩니다.
이순신 장군처럼 난중일기를 쓰셨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문신이었지만 의병장으로 활동하여 함경도를 되찾은
공로를 뒤늦게나마 북관대첩비로 찾아내어 다행입니다만
우리 후손들이 잊혀진 의병장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후대에 전승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글 이부경 
010-2228-1151/pklee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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