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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암의 황해도 연안성 전투!!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0-11-23

조회 16,456



이정암의 황해도 연안성 전투!!

선조실록 1592년 9월 19일
음력 8월 22일에 초토사 이정암이 의병 5백여 명으로
텅빈 연안성으로 들어가며 흩어진 사람들을 부르고
군량을 모으며 병기를 수습하며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8월 28일에 해주와 강음의 왜적 약 3쳔 명이
연안성으로 진격해 와서 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였다.
주야로 성을 지키며 싸워 적군의 사상자는 매우 많았고,
우리 군사는 31명이 전사하였다.  9월 2일에 비로서
왜적이 포위를 풀고 떠나갔다.  이정암이 왜적 수급
18급, 소와 말 90여 필, 군량미 130여석을 노획했다고
보고하였다. -(後略)-

- 윤인식 글 [역사추적 임진왜란]  -  에서 발췌

광해군 분조로부터 황해도 초토사로 임명된 이정암은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황해도 일대의 의병을
모집하여 백성들과 함께 연안성을 지켜냅니다.
관군들이 없으면 우리들이라도 싸워야 한다는 일념에
하나로 뭉치는 국민 통합의 의미도 있는 귀중한 전투
입니다.

이정암은 문신으로서 당시 이조참의를 지냈으나
선조가 의주로 피란을 가자 자진해서 의병장이
되어 황해도 곡창지대를 지켰습니다. 나라를 구하는
일에 반상이 따로 없다는 것은 의병들이 참전한
전투에서 볼 수 있는 조선 백성들의 저력입니다.

왜군 3번대  구로다 나가마사는 평양까지 갔다가
황해도로 다시 남하하여 황해도 여러지역을 점령
하였는데 연안성 전투에서는 약 3천 명의 병력
으로도 대패하고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일본측 기록에는 "조선인 수천명이 반란을 일으켜
즉시 그들을 진압하고 돌아왔다." 고만 적혀 있는
것을 보면 구로다 나가마사기(黑田長政記)와
구로다 가보(黑田家譜)  등에서는 주군의 행적을
상당히 미화한 것 같습니다.

1번대 고니시 유키나가, 2번대 가토 기요마사는
잘 알려져 있지만 3번대의 구로다 나가마사는
기록에서도 별로 찾아 볼 수 없어 이번 기회에
소개하려고 합니다.
 
황해도를 담당한 구로다 나가마사는 지금의
후쿠오카 성주로서 당시 25세의 젊은이로 2번대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3번대를 이끌고 쳐들어왔으며
부산 상륙 후에 김해, 창원, 창녕, 성주, 추풍령 등으로
진격하여 평양까지 갔다가 연안성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습니다. 

권율장군의 행주산성 전투 때에도 패하였고, 2차
진주성 전투에도 참전하였으나 큰 피해를 입고
부산으로 돌아갔으며 충청도 직산 전투에서도
패하고 남하하여 구포왜성에 포진해 있다가 일본
으로 철수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에서 싸웠고 전공을 세워
후쿠오카를 녹봉으로 받았고 그 후손들은 영주를
이어가게 되었는데 6대째에 대가 끊기고 모계로
이어져 지금의 미쓰비시 재벌을 창업한 이와사키
가문으로 이어집니다.

구로다 나가마사의 손녀딸 집안인 미쓰비시는
세계2차대전 대에는 무기생산업체로 성장하다가
오늘날에는중공업을 비롯해 기린 맥주, 로손 편의점,
아사히 유리, 니콘 카메라가 미쓰비시 산하 업체
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과거의 사실만 아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들을 파악하고 미래의 통찰력을
키우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후쿠오카를 가게되면 구로다 나가마사에 대하여
좀 더 많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야 하겠습니다.

글 이부경
010-2228-1151/pklee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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