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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을 포기하도록 설득한 일....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1-01-04

조회 16,239



평양성을 포기하도록 설득한 일....

....(前略)....병사들의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아고스티뉴를 이해시켰고 , 그는 그곳에서
가까이 있는 성으로 철수할 것을 결정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 가능한 아무 소리도
내지않고, 보루에는 깃발을 꽂아 놓고, 횟불도
평소처럼 밝혀 두고서, 온갖 신경과 주의를
기울여 모든 환자와 부상자를 나르도록 명령을
내리고 나서 아고스티뉴는 적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평양성을 빠져  나왔다.... (後略)....

-  루이스 프로이스 지음 [임진난의 기록]  -  에서 발췌

위의 글은 포르투칼 출신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쓴 [일본사]의 제77장에서 발췌
하였습니다.  그는 1563년 일본에 도착하여
1597년 나가사키에서 사망할 때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위선적 행위, 임진왜란 발생과 전개 
과정 및 강화 협상 내용 등을 이방인의 눈으로
솔직하고 상세하게 언급했으며 한반도와 관련해
가장 많은 자료를 남겼습니다.

1593년 1월6일부터 8일까지 명나라의 이여송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탈환하였는데, 패배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밤중에 얼음을 타고 대동강을 건너
빠져 나갔으며, 처음에는 비겁한 행위나 도망치는
것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습관을 이유로 들며 평양성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을 병사들이 설득하여 서울까지 도망갑니다.

임진왜란의 제1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아버지 때
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긴 사카이(堺)의 상인의
아들로 기리스탄 다이묘로서 가톨릭 신자이며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인데 이 책에서는 아고스티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위는 대마도 도주 소 요시도시로 조선침략의
제1 선봉에 함께 나섰습니다.

왜적으로서는 한양성에 처음 입성하는 것을 시작으로
북진하여 평양성을 함락 시켰으나 그 후 평양성을 내어
주고 명나라와 강화협상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며 남쪽으로 쫒겨갑니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부하들의 진언을 받아드려 평양성을
포기하고 서울로 퇴각하였다는 것인데 원균처럼 고집
부리며 버티지 않았다는 것이 고니시 유키나가에게는
행운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노량해전이 한창일 때 순천 왜성을 몰래 빠져나가
일본으로 돌아간 고니시 유키나가는 1600년에 있었던
도요토미 정권을 지키려는 세키가하라(關原)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배하므로서 할복이 아닌
참형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부하들의 설득을 받아드리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나
대의를 위해서 어려운 결정을 한 것으로 판단되며 비록
왜적이지만 남의 말을 경청 한다는 자세는 제1선봉장으로
지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안목이 괜찮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일본이 세계의 흐름과 주변국에 대하여 진정으로
경청했으면 좋겠습니다.

글 이부경
010-2228-1151/pklee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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