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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의후의 임진왜란 첩보 편지....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1-05-04

조회 15,847



허의후의 임진왜란 첩보 편지....

일본의 새 관백 평수길이 8개 나라를 합병하고
오직 관동(關東)만 항복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1590년 정월 8일에 여러장수들을 궁전 앞에
모아 놓고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관동 지방을
치라고 명하면서 "성을 겹겹으로 에워싸고
사방에 성을 쌓아서 지켜라. 나는 곧 바다를
건너 명나라를 침략하겠다." 하고, 비전태수
(肥前太守)에게 명해 배를 만들라고 했다.(중략)
관백의 친병(親兵) 50만 명을 더하여 합계
100만 명, 대장이 150명, 전마(戰馬)가 5만 필,
대서(大鋤) 5,000자루, 참도(斬刀) 10만 개,
장창(長槍) 10만 개, 도끼 10만 개, 작시도
(斫柴刀) 50만 개, 조총(鳥銃) 30만 자루이며,
삼척장검(三尺長劍)은 사람마다 몸에 차게 했다.

-  박종인 지음 [대한민국 징비록]  -  에서 발췌

허의후는 명나라 복건성 사람으로 전국시대에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혀 시마즈 요시히로 휘하에서
의원을 하며 쓰시마 섬을 오가며 약장사를 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를 공격하려는 계획과
상세한 정보를 1591년 9월에 명나라 지방군 사령관
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조총이 30만 자루 입니다.
조총은 1543년 일보 규슈 가고시마 본토 남쪽의
작은 섬 다네가시마에 포르투갈 난파선이 상륙
하면서 철포라는 이름으로 소개 되었습니다.

그 당시 15세의 도주 다네가시마 도키다카는
매우 "보기 드문 보물이다." 라며 철포 두자루를
사서 대장장이 야이타 킨베에게 주며 역설계해서
만들게 했는데 1년만에 국산화에 성공하였으며
불과 49년만에 30만 정을 생산 하였으니 실로
가공할만한 일입니다.

조총 30만 정은 당시 유럽 대륙 전체가 소유한
소총보다 많은 숫자로 이 철포를 따라 들어온
유럽의 문명은 일본을 대등한 수준의 교류를
시작하게 해 주었습니다. 또한 유럽은 일본을
발견하며 세계 질서는 재편되어갔습니다.

조선은 1555년 5월에 왜인 평장친(平長親)이
총통 한자루를 들고 부산으로 와 귀화를 요청
했지만 명종은 이를 무시했고 대신들의 철포
제작 요청도 거부했으며 1589년에 대마도
사람들이 다시 철포를 가져오자, 선조는 철포를
무기고에 보관시키고 잊어버렸습니다.

1592년 4월 13일 조선침략의 선봉에 선 일본군
병사 중에는 다네가시마의 도주 도키다카의 아들
히사토키가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그 도륙의
현장을 포르투칼에서 온 종군 신부들은 빠짐없이
기록 했습니다. 역사가 던지는 뼈아픈 경고장이
되었습니다.

1543년에 시작한  동아시아의 역사는 이렇듯
같은 시기, 같은 물건을 보아도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에 따라서 한쪽은 부국강병의 무기가
되었고 한쪽은 자기발로 걸어 들어온 철포도
팽겨쳤고 예고된 전쟁에도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지금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지, 세계의 질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그냥 넋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코로나 방역에만
핑계대며 국제정세의 판을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불과 15세의 나이에도 작은 섬의 도주는 미래를 
읽는 혜안을 가졌습니다.  지금의 우리들이
세상의 편리함에 익숙하여진 이기심으로 새로운
기술에 대한 호기심, 상상력, 도전정신을 발휘하지
못하고 역사를 잊으며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면
우리 후손들의 밝은 미래는 없을 것입니다.

글 이부경
010-2228-1151/pklee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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