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실천하는 이순신 포럼

충무공 이순신 > 이순신 리더쉽

명나라로 건너간 조선 유민에 대하여....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1-05-17

조회 15,605



명나라로 건너간 조선 유민에 대하여....

1598년(선조 31)에 진주정사 이항복(李恒福)은
북경을 다녀오면서 조천록(朝天錄)을 남겼다.
이 책자에는 중원에 건너간 조선 유민에 관한
여러 내용이 담겨 있다.  이 해 12월에 이항복이
요동 회원관(懷遠館)에 며칠 머물며  요동 군부와
만나 사행 업무를 처리했다. 한 젊은이가 자주
회원관을 찾아 하인들과 친숙하게 지내면서
자신의 신분에 대해 토로했다. 자신은 공덕리
(孔德里) 출신이며, 요양에 들어와서 동가의
가정이 되었다. 요양성 내에 사는 조선 유민의
수는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공덕리는 전북
김제 공덕면에 소재한 마을이다.

-  박현규 지음 [임진왜란 중국 사료 연구] - 에서 발췌

백사 이항복이 1598년(선조 31) 정응태(丁應泰)의
무고사건을 변무(辨誣) 하기 위해 파견된 조선
사신단의 정사(正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사행 여정동안 지었던 시와 산문을 모아 기록한
책이 조천록(朝天錄)입니다.

명나라에서 사신으로 왔던 정응태는 조선에 함께
사신으로 온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무고하다가
조선 조정에서 양호를 두호하자, 조선 조정이 왜와
밀통하여 명나라를 치자고 한다고 명나라 신종에게
무고하여 조선을 난처한 입장에 빠트린 사건 입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수많은 조선의 민초들은 난리통에
가족과 가산을 잃고 고향을 떠나 도처로 유랑하였고,
이들 난민 중 상당수는 굶주림을 피해 조선을 도와
참전한 명나라 진영에 몰려들었고 명군 장수들은
이들을 구휼해 주거나 군사로 활용하기 위해 이들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 후 이들은 철수하는 명군을
따라 국경을 넘어갔습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로 건너간 조선 유민이 1만명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1593년 ~ 94년 명나라 장수
유정이 전라도와 경상도에 주둔할 때 투탁(投託 :
남의 세력에 기댐)한 조선인을 유정이 귀국할 때
그대로 데리고 갔다는 내용이 이항복의 문집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조선 유민들은 한반도와 가까운 랴오동(遼東)지역을
중심으로, 장쑤(江蘇), 저장(浙江), 쓰촨(四川)에
살았는데 유민의 일부는 군인이 되거나 명군 유력가
집안의 하인이 되었고, 유랑 걸식하며 사는 이도
있었습니다. 경주 향리의 아들로 중인으로 추정되는
최용회라는 명나라에서 병사 3,000명을 이끄는 감주
참장(오늘날 준장급)에 오른 유민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인하여 일본으로 납치되어
가고, 포로로 잡혀가고, 명나라로 유민이 되어 자기
나라를 떠난 우리 백성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지도자의 잘못된 판단과 의사결정으로 이렇듯 험한
꼴을 당해야 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우리가 두 번 다시 이런 비참한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임진왜란을 제대로 알고 반성해야 하며 그동안 미처
몰랐던 역사를 통해 보다 더 나은 미래로 갈 수 있는
희망을 품고 새로운 국제질서에 도전해야 합니다. 
역사에서 배우는 통찰력은 어느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는 우리의 자존감이기 때문입니다.

글 이부경
010-2228-1151/pklee95@hanmail.net


추천메일 보내기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