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실천하는 이순신 포럼

충무공 이순신 > 이순신 리더쉽

탄핵받은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1-05-25

조회 15,599



탄핵받은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

1595년 5월 25일(丁酉).  맑다. 늦게 비가 왔다.
경상수사, 우수사, 충청수사가 같이 모여 활 9순을
쏘고, 충청수사가 술을 내어 몹시 취하여 헤어졌다.
배 수사에게서 김응서(金應瑞)가 거듭 대간들의
논란을 받고 또 원수(權慄)도 거기에 들어있다는
말을 들었다.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난중일기에는 대부분 이순신과 조선수군에 관한
수전(水戰)들만 적혀 있어 육전(陸戰)의 병사들과
관군들에 대하여는 거의 알려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은 위의 난중일기에 나오는 김응서(金應瑞)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정유재란 때 왜적의 이중간첩 요시라의 속임수에
넘어가 나라를 위태롭게 한 것은 물론 이순신
장군을 모함하고 백의종군까지 하게 만든 인물이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 입니다. 

김응서의 보고서는 도원수 권율에게 그리고 선조
임금까지 올라갔으며 임금은 이순신에게 부산포
앞바다로 나가서 다시 쳐들어오는 왜적을 막으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거짓 정보인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김응서(金應瑞 1564~1624)는 명나라의 이여송과
함께 조명 연합군을 이끌고 제4차 평양성 전투에서
평양성을 탈환하는 큰 공을 세웠습니다. 

전쟁이 강화교섭으로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전선이
지루하게 이어지자 왜적의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
등을 직접 만나 회담을 하며 그 일로 사적으로
서면 연락을 하는 등 왜적에 빌붙은 것이 아닌가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탄핵을 받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 후 1603년 충청병사가 되었으며 광해군
시대에는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북방을 지켰습니다.
명나라가 후금을 토벌하기 위해 구원병을 요청하자
부원수로서 도원수 강홍립과 함께 나갑니다.  사르후
전투에서 패하자 강홍립이 투항하는 바람에 포로가
되고 맙니다.

포로가 된 김응서는 후금의 자세한 정세를 일기
형식으로 기록하여 비밀리에 조선으로 보내다가
발각되었고 강홍립은 이 사실을 누루하치에게
고발했고 이국 땅에서 비참하게 처형당합니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서 임진왜란을 맞으며 헤쳐나간
김응서의 삶을 되돌아보며 선조 임금이 국방에 대한
인식이 조금이라도 의지가 강했다면 이렇게까지 
중국이나 일본에 휘둘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은
지도자가 현명하고 강해야 나라도 있고 백성도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글 이부경
010-2228-1151/pklee95@hanmail.net


추천메일 보내기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