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 이순신 리더쉽
관리자
2021-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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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목사 서예원(徐禮元).....
1593년 7월 2일(甲寅). 맑다. 늦게 우수사(李億祺)가 와서
만나보았다. 선전관(柳珩)은 오후에 돌아갔다. 저물녘에
김득룡(金得龍)이 와서 전하기를, 진주성이 함락되고
황명보(黃明甫), 최경회(崔慶會), 서예원(徐禮元), 김천일
(金千鎰), 이종인(李宗仁), 김준민(金俊民)이 죽었다고 한다.
놀랍고 비통함을 이길 길이 없다. 그러나 그럴 리가 결코
없을 것이다. 필경 미친 사람이 잘못 전한 말일 것이다.
초저녁에 원연(元埏 : 원균의 동생)과 원식(元埴)이 와서
군중(軍中) 일들에 대하여 함부로 말을 했다. 가소로웠다.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1592년 10월의 1차 진주성대첩은 3,800명으로 3만명이
넘은 왜적들을 물리친 진주 목사 김시민 장군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러나 1593년 6월의 2차 진주성 전투는
그 날 진주성을 사수했던 5,800명의 결사대를 우리는
잊고 있었습니다.
5,800명 의병들 중에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의병들은
140여명 밖에 안된다고 하니 이름없는 하층민의
민초들이 진주성을 지키며 말없이 스러져갔습니다.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는 의병들의 헌신과 희생을
우리가 잊고 있었습니다.
진주성이 함락되던 6월 29일에 동문쪽의 성이
비에 허물어지니 적들이 개미떼처럼 기어 올라왔다.
적들이 드디어 성 위에 올라 무력을 시위하자
성가퀴를 지키고 있던 군사들은 흩어져 촉석루로
들어가고 서예원은 먼저 달아나 숨어버렸다.
(선조수정실록 1593년 6월)
당시 진주 목사였던 서예원(徐禮元)은 성이 무너지자
숲속으로 도망 가다가 적에게 잡혀 죽고 그 머리는
적들이 베어다가 일본까지 가져가서 오사카성에
매달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황명보(黃明甫)는 이름은 진(進)이며 자는 명보인데,
황희 정승의 5대손으로 1591년에는 통신사로 일본까지
갔다 왔으며 진주성 전투에서 창의사 김천일 등과 함께
항전하다 제일 먼저 죽었으며, 최경회(崔慶會)는 해주
사람으로 임진년에 의병을 일으켜 금산, 무주에 이르고,
경상우병사가 되어 진주성에서 싸웠으며 논개는 성이
주씨이며 최경회의 후처로서 우리가 아는 기생이 아님을
밝혀둡니다.
김천일(金千鎰)은 나주 사람으로 37세 때에 과거에
올라 용안 현령을 시작으로 담양 부사를 지냈으며
56세 때에 임진란을 당하자 고경명(高敬命)등과 의논
하여 나주에서 의거를 일으키고 진주성이 함락 되던 날
맏아들과 함께 촉석루에서 강 위로 몸을 던졌습니다.
이종인(李宗仁)은 전주 사람으로 병사 이구침(李龜琛)의
아들입니다. 김해 부사로서 군사를 이끌고 황진과 함께
힘껏 싸워 적을 무수히 죽였으나 성이 무너지자 "김해
부사 이종인은 여기서 죽는다." 고 외치며 강에 몸을
던졌습니다. 김준민(金俊民)은 6월 29일 진주성이
무너지는 날 그는 거제 현령으로서 힘껏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이렇듯 나라를 위하여 목숨 바쳐 싸운 의병장들은
선조 임금의 논공행상에 정의와 공정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의병장들은 아무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였으며 의병들의 공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분노하는 정의와 공정, 400여년
전의 임진왜란 때와 다를바 없습니다. 역사는
말없이 전하고 있습니다. 정의는 시대가 변해도
사라지지 않고 그 가치를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 또 있습니다.
세계에서 유일한 조선의 의병들의 의로움과 억울함
그리고 그들의 삶을 재조명하여 기리는 것입니다.
나라가 위급할 때 자발적인 애국의 힘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밝혀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후손
들이 해야 할 일 입니다.
글 이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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