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 이순신 리더쉽
관리자
2021-09-28
15,002
고향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1598년 11월 18일
전사한 이순신의 유해(遺骸)는
맨 처음 남해 충렬사 뒤편에 모셨다가
1598년 11월
(前略)
조선 수군의 몸과 마음을 하나로 뭉치며
1,500여 호 피란민들이 살아가도록 둔전을 경영했던
고금도, 수군을 다시 일으킨 고금도에
80일간 봉안했다.
1598년 11월 30일
“이순신에게 증직(贈職)하고 치부(致賻)하고
관(官)에서 장사를 도우라.”라는 전교를 받고
장례 절차를 진행하게 되었다.
1599년 2월 11일
고향 아산으로 유해가 들어왔을 때
남녀노소 백성들이 통곡하며 뒤를 따랐고
선비들이 제물을 차리고 제문을 지어 애통해 하며
명나라 두사충이 잡아 준 자리에 안장했다.
고을 선비들이 마음을 모아
그곳에 “위충암(爲忠巖)”이라는 비석을 세웠다.
16년후, 1614년
지금의 어라산 묘소로 이장 되었다.
1644년
인조(仁祖) 임금이 이순신에게
“충무공(忠武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 조신호의 [충무공 이순신 서사시] - 에서 발췌
이순신 장군께서 고향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영구는 고금도를 떠나 아산으로 돌아왔습니다.
제독과 부하 여러 장수들도 모두 만장(挽章)을
지어 슬퍼하였으며, 후에 명나라 군사들을
철수하여 돌아갈 때에도 도독은 신창현(新昌縣)에
들어서면서 먼저 사람을 보내어 제사 지내러
오겠다는 뜻을 알렸습니다.
회(薈)가 맞이하러 나가서 길에서 도독을 만났는데,
말에서 내리자 도독 역시 말에서 내려 그의 손을
마주잡고 통곡 하였으며, 임금께서도 예조의 관리를
보내며 제사를 올리게 의정부 우의정을 추증하셨습니다.
아산 금성산(金城山) 아래 서쪽에 자리잡은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부친 덕연군(德淵君)을 모신 선영에서
서쪽(西方) 1리쯤 되는 곳입니다. 그 후 16년이 되는
갑인년(1614년)에 어라산(於羅山) 북쪽(壬方)의 언덕
위로 옮겨 모셨으며, 지금의 현충사에서 약 9km
떨어진 아산시 음봉면에 있습니다.
구사일생으로 사지(死地)에서 살아난 진린 도독이
귀국 후 명나라 황제에게 “이순신은 경천위지지재
(經天緯地之才)라고 보고했으니 나라와 하늘을
받들어 세상을 훌륭히 다스린 인물(經天緯地)”
이라는 뜻입니다. 일찍이 주(周)나라 강태공,
한(漢)나라의 장자방, 촉(蜀)의 제갈량에게만
붙여졌던 인물평에 이순신에게 명나라 도독
벼슬과 상으로 팔사품(八賜品)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을 살아가면서 마음의 여유가
없어 앞뒤도 돌아보지 않고 살아온 내가
진정 바라는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까요?
적들과 싸우고 있는 전쟁터에서 부하장령들을
다스리는 성실(誠實)한 자세, 싸움마다 이기는
성공(成功)적인 작전, 난중일기를 통한 반성
(反省)과 통찰(通察), 이순신의 성(誠), 성(成),
성(省)은 윗사람으로서의 섬기는 리더십으로
우리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리더의 참모습
이라고 생각합니다.
글 이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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