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 이순신 리더쉽
관리자
2021-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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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가 이순신!!
승지(承旨) 최유해(崔有海)의 이충무공 행장(行狀)
(前略)
기축년(己丑: 45세. 1589년)에 전라감사
이광(李洸)이 위에 청하여 그 도의 조방장
(助防將)으로 삼았다. 11월에는 무신(武臣)
으로서 선전관(宣傳官)을 겸하게 되었다.
12월에는 정읍(井邑) 현감으로 나갔는데,
태인(泰仁) 현감을 겸임하게 되어 태인으로
갔다. 그때 태인은 오랫동안 현감 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에 처리하지 않은 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으나, 공이 물 흐르듯이
신속하게 처결했더니 그곳 백성들이 어사(御使)
에게 글을 올려서 공으로 하여금 태인 고을을
다스리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後略)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이순신은 32세에 무관에 합격하여 함경도 동구비
(童仇非)의 권관으로 시작한지 14년 만에 정읍
현감이 되어 후방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지방 도시의 시장쯤 되는 벼슬로
고을을 다스리는데에 있어서도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나중에 삼도수군
통제사가 되어서 한산도 통제영을 경영한 것을
보면 장수라기보다는 군사 행정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다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의 대표적인 행정가 황희 정승, 다산 정약용
선생, 그리고 서애 유성룡 대감을 보더라도 행정은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기본 입니다. 윗사람을
설득하고 아랫사람을 통솔하는 리더십을 발휘해야만
일이 추진되어 집니다.
일은 내가 마음 먹은대로 성공 하는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장애물도 만납니다. 나를 마크하고 견제하는
세력들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어떻게 대응하며
관리하느냐에 따라 일의 성패가 결정되어집니다.
정읍현감에서 또 태인현감까지 겸직하면서 무엇이
우선이고 어떻게 처리해야 옳은 것인지, 한 고을을
다스리면서 얻은 행정 경험은 임진왜란이라는
엄청난 국난을 헤쳐나가는 지혜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는 벼슬길에 갓 나왔을 때 자신의 포부를
"丈夫生世 用則效死以忠 不用則 耕野足矣“ 대장부
세상에 나서 쓰이면 죽을 힘을 다하여 충성할 것이요,
쓰이지 못하면 농사짓고 살면 또한 족한 것이다." 라고
밝히며 말한대로 초심의 굳은 신념으로 실천한 것으로
생각 됩니다.
글 이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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