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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 원균의 군공평가.....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1-12-13

조회 14,677



이순신과 원균의 군공평가.....

선조실록 35권 7월
(前略).....중국 조정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적을
몰아내고 강토를 회복했으니 이 또한 옛날에
없었던 공적이다. 이것은 오직 호종했던 신하들의
충성 덕분이지 사람들이 한 일이 아니다. 또 힘껏
싸운 장수들에 대해서는 그 공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겠으나 우리나라 장졸에 있어서는 실제로
적을 물리친 공이 없다. (後略)

선조실록 36년 6월
(前略)..... "원균은 당초 군사력 없는 장수로서
해전에 참여하였고, 뒤에는 주사(舟師)를 침몰
시킨 과실이 있으니, 이순신, 권율과 같은 등급
으로 할 수 없어 한 동안 낮은 2등 공신에 녹공
했던 것인데, 방금 성상의 분부를 받들어 원균의
등급을 올려 1등에 넣었습니다. (後略)

- 이순신연구논총 16, 장학근의 논문에서 발췌  -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쟁이 끝나고 전공자들을
포상하는 것은 일반적인 관례로 이순신과 원균의
군공평가는 선조임금과 군공청의 관료들과 많은
불협화음을 일으키며 오랫동안 여론의 검증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순신과 원균이 나란히 선무일등공신에 오르게
되었는데 시대가 지나면서 이순신은 국민적 영웅
으로 추앙받게 되었으나 원균은 패장(敗將) 혹은
겁장(怯將)으로 비난 받고 있습니다.

선조는 전쟁이 일어나자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파천을 했으며, 피난 도중에 요동 망명이 실행
되도록 신하들을 다그쳤는데, 이것은 민심의
이탈로 이순신의 군공평가를 어떻게 하든 희석
시켜 실추된 왕의 권위를 만회하려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을 궤멸시키
것을 두고 비변사가 재촉하고 권율이 윽박
지르자 원균은 패전 할 것을 알면서도 출진
하여 순국하게 되었다고 적극 두둔하였는데, 
이것은 이순신의 군공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기도 합니다.

전쟁이 나자 호종했던 관료 대부분이 차츰
도망가자 후에는 간관과 사관까지 임금을 
버리고 도망갔는데도 호종공신 86명, 선무
공신 18명, 청난공신 5명으로 녹훈하였습니다.

원균이 적에게 기습을 당하는 지휘능력 부족과
수군 장수의 수치인 육지에서의 전사하는 모습에
비해 이순신은 전사하는 순간까지 모범적 지휘
통솔, 임종 직전의 충정어린 유언, 그리고 순국
후 백성들의 추모 열기 등이 비교됩니다.
 
이순신과 원균의 전사기록은 선조의 군공평가
보다는 백성들의 군공평가가 정확하게 말해주듯이
국가의 수치를 씻어주는 사람은 이순신 장군이라는
것을 기록함으로서 민의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글 이부경
010-2228-1151/pklee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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