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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022-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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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안보외교에 대하여.....
그때 나(류성룡)는 예조판서로서 또한 왜국사신을
예조 안에서 대접하고 있었는데, 통신에 대한 의론은
오랫동안 결정되지 못했다. 내가 대제학(大提學)이
되어서 국서를 쓰려고 할 때 임금에게 글을 올려
"이 일은 빨리 의론을 결정하시어, 두 나라 사이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하시옵소서" 라고 청했고, 이튿날
조강(朝講)에 지사(知事,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변협
(邊協)등도 또한 "마땅히 사신을 보내어 보답하도록
하고 또 그들의 동정도 살펴보고 오는 것이 잘못된
계책은 아닐 것입니다" 라고 아뢰어서 그제야 비로서
조정의 의론이 결정되었다.
- 서애 류성룡 지음 이재호 옮김[징비록] -에서 발췌
16세기 일본의 새로운 권력자로 등장한 풍신수길은
자기 임금을 죽이고 왕위에 등극한 역적이라고 파악
하고 있던 조선의 조정에서는, 그의 청을 받아들여
통신사를 보내자니 역적 행위를 용인하는 것으로
되고, 무한정 거절하자니 국가 간의 외교문제와
무력침범이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발생하고, 이에
진퇴양난에 빠진 선조는 결국 통신사를 파견하게
됩니다.
당시 조정의 대신들은 동북아시아의 정세 변화에
큰 관심없이 오직 명(明)에 대한 친선 관계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일본과의
관계는 고려말부터 계속 되었던 왜구문제를 해결
하는 데에만 중점을 두어서, 조선은 왜구에 대한
회유책으로 교린외교정책을 폈고, 대게 일본과 직접
접촉하는 대신 쓰시마도주(對馬島主)를 중계로 하는
외교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조선은 중국에 조공무역과 함께 사대를 하고 일본에는
교린정책으로 외교를 풀어나갔습니다. 16세기에 들어
가면서 동북아 국제 정세가 바뀌어 가며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 하면서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이제는 단순히 왜구 문제만 풀어서는 안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조선의 안보외교는 명나라에 대한 조공무역과
밀접한 관계로 첫째는 조선의 국왕에 대한 정통성
확보와 둘째 조선의 안전보장의 문제였습니다.
국제사회에서의 승인과 영토보전은 당시 동북아지역
에서 패권국가로 등장한 명나라와 지속적 관계 유지에
길을 열었습니다.
실제로 명나라와의 친밀한 관계는 임진왜란 때에,
조.명연합군으로 왜군을 물리치고 조선에 구원군을
파병하여 원조하였습니다. 그 당시 조선의 안보외교
정책을 살펴보고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 등을
고려해 볼 때 너무도 중요한 시점에 서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절대로 방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글 이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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