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 김면의 선비정신.....
(前略) 여러 차례 빛나는 전공을 세워 경상도 의병대장과 경상우도병사에 임명 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전란의 와중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의병을 일으킬 때는 "나라가 위급한데 목숨을 바치지 않고서 어찌 성현의 글을 읽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 포효했던 김면은 "나라가 있는 줄 알았지 내 몸이 있는 줄은 몰랐다" 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後略)
- 송암 김면과 임란의병 - 에서 인용
신하로서 충(忠)에 죽고, 자식으로서 효(孝)에 죽어야 한다는 의병 봉기의 대의(大義) 명분을 충실히 따른 김면의 의병 활동을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김면의 본관은 고령이며 조부는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좌병사를 지냈고, 부친 김세문은 경원도호부사로 오랑캐의 침입을 격퇴하여 공을 세웠습니다. 당시 52세로 노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을 당하여 2개월만에 김면은 의병을 모집하여 기병하였습니다.
만석의 거부였던 그의 집안이 재정지원을 해 주었는데 집안에서 부리던 종 700명도 함께 창의하며 1592년 6월 9일 고령 개산포 전투에서 첫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어서 무계, 우척현, 지례 등지에 주둔한 왜군들을 단독으로 때로는 정인홍, 곽재우, 김시민 등과 연합하여 크게 무찔렀습니다.
김면은 가산을 남김없이 의병활동에 사용했고 그의 사후 처자식은 문전걸식을 해야할 처지로 전락하기도 했답니다. 1607년 조정에서는 그에게 다시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선무원종공신 1등으로 녹훈했습니다.
비록 짧은 기간의 의병활동을 통해서 나타난 그의 선비정신은 민.관군의 힘을 하나로 모으며 평생 무욕의 삶을 실천하면서 오로지 나라만을 걱정하고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았던 김면의 선비정신은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글 이부경 010-2228-1151/pklee95@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