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 유격(沈惟敬)누구인가?....
1597년 6월 29일(戊子). 맑다. 이희남(李喜男), 이방(李芳)들이 돌아왔다. 중군장(李德弼)이 심준(沈俊)과 함께 와서 전하기를, 심 유격 (沈惟敬)이 붙잡혀 갔는데, 양 총병(楊元)이 삼가(三嘉)로 와서 그를 결박해서 보내더라고 하였다.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심유경(沈惟敬)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石星)이 유격장군이라는 벼슬을 주어 파견한 사람으로 요동부총병 조승훈을 따라 명나라 원군으로 1592년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당시 평양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 유카나가 (小西行長)는 이순신의 한산대첩으로 남해안의 제해권을 확보하지 못하여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명나라의 심유경이 제안한 강화회담을 받아들여 강화교섭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의 황제에게 요구한 사항은 1. 명의 황녀를 일본 천황의 후비(後妃)로 삼을 것 2. 명나라와의 무역을 재개할것 3. 조선 팔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4. 조선 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 이었습니다.
강화 협상을 주도한 명의 심유경과 왜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러한 협상은 결렬되리라는 것을 알고 명 황제와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속이기로 합니다.
1596년 9월 2일 그들은 오사카성에서 명황제의 국서를 전달 하는데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한다는 것 외에는 왜의 어떤 요구 사항도 없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1597년 정유재란을 일으키고 맙니다. 거짓말이 탄로난 심유경은 일본으로 망명하기 위해 남쪽으로 도망 가는 도중, 의령 부근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에게 체포되어 "나라와 황제를 기만한 죄"로 처형 되었습니다.
갑자기 임진왜란을 당하여 나라를 방비하는 확고한 전략과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을 때 조선의 외교 안보의 약점을 교묘히 파고들어 거짓 외교로 삼국을 혼란에 빠트린 장본인인 심유경의 강화교섭 과정을 보며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까요?
지금은 다자간의 외교각축으로 나라의 국익을 도모 하는 수준 높은 외교정책을 요구하는 시대 입니다. 상대방보다 한 수 위를 더 읽어야 하는 중요한 안보 동맹, 전략적 협력,다자협력 공동체 구축 등 그야말로 안보는 국력 입니다.
이러한 글로벌 경제시대에 우리 회사는 어떠하십니까? 기술개발이나 영업이 잘 된다고 해서 안심하고 계시는 것은 아니신지요? 주력 상품의 홍보나 대외협력, 협력 회사간의 정보교류 등 회사의 외교는 누가 책임을 지고 하는지 면밀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CEO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른 회사 사람들이 농간을 부리도록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겠지요. 이순신 장군이 주도적으로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하여 전승무패를 기록한 것을 이제서야 알겠습니다. 경영비젼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결행만이 경영의 기본이자 성공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글 이부경 010-2228-1151/pklee95@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