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8년 10월 6일(戊午). 맑다. 서풍이 세게 불었다.
도원수(權慄)가 군관을 보내어 편지를 전하기를 ,
유 제독(劉綎)이 달아나려고 한다고 하였다. 통분,
통분할 일이다. 나라의 일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왜군들은 철수하기에 급급
합니다. 특히 순천 왜교성에 갇힌 고니시 유키나가는
하루라도 빨리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명나라 군문 형개(邢玠)는 사로병진작전으로 동로군은
울산 왜성의 가토 기요마사를, 중로군은 사천 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를 서로군은 순천 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를 그리고 진린에게 바닷길을 맡게 하여
퇴각하는 왜군들을 일거에 쓸어버리려고 했습니다만
모두 이기지 못했습니다.
더우기 서로군인 명나라 유정 제독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뇌물에 매수되어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 도망 가려고 합니다.
따라서 수로군인 명나라 진린 도독과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단독으로 왜교성 전투를 치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의정 이덕형은 장계에서 "유(劉) 제독은...... 공격도 하지
않고 퇴각도 하지 않으면서 각 군사들이 한자리에서 반나절
동안이나 서 있다가 적의 탄환만 맞았습니다. 제독이 하는
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라고 올렸습니다.
국난을 당하여 명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 후 명나라의 참전의 태도를 볼 때 과연 우리를
도우러 온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적을 공격하고 이길 수 있는 힘이 없다면 수비와
외교에만 의존 한다면 우리의 생명과 재산은 지킬 수
없으며 각 나라의 입장만 대변하는 전쟁터만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역사는 알려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자주국방을 외치지만 진정으로 적을 물리칠
수 있는 참 실력과 튼튼한 국방력이 준비되어 있는지 다시
한 번 점검해 봐야 하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명나라에 전시작전권이 있음으로해서 이순신은 물론
이거니와 조선이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선조 임금이나 조정 대신들 그리고 하급 관리와
군사들까지도 온갖 수모와 능욕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백성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겠지요.
현자는 역사에서 배우고 어리석은자는 경험에서 배운다고
했습니다. 임진왜란 같은 국난은 두 번 다시 당하지 말라고
징비록도 써 주셨습니다. 태평세월에 편안하게 보낼 수
있는 환경에서도 때로는 이순신의 유비무환의 정신을 가다듬어
볼 때가 바로 오늘이라는 생각 입니다.
글 이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