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을 세자로 세웠다. 세자가 동궁(東宮)으로
나오니 백관들이 축하하였다. 김명원(金命元)을
기복(起復 : 상중에 있는 사람을 임금의 명령으로
기용하는 것)하여 도원수로 삼고, 신각(申恪)을
부원수로 삼아 한강에 주둔하며 방어하게 하고,
변언수를 유도대장(留都代將 : 도성에 남아서
지키는 장수)으로 삼았다.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보름만에 국본(國本)을 세웁니다.
나라의 후계자를 미리 준비하지 않고 있다가 일이 터지고
나서야 부랴부랴 광해군을 불러들입니다.
왕세자를 세우는 것이 국가의 중대사이니만큼 선조 임금
께서 생각하지 않으신것은 아니겠지만 전쟁의 조짐은
벌써부터 감지되고 있었기에 더욱 답답하기만 합니다.
전쟁 중에 책봉의식도 갖추지 못한채 왕세자로 책봉
되었으니 얼마나 경황이 없었겠습니까? 광해군 자신도
미처 받을 준비가 안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국가의 경영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니건만 선조 임금께서는
중전의 몸에서 나온 왕자로 세자 책봉을 하려고 기다리는
개인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국가나 회사는 평소에 비상체제를 준비 하고 훈련하는
것은 당연한 일 입니다. 지도부가 갑자기 무슨 일을 당하면
지휘체계가 무너지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의
전략은 적의 대장만 잡는 대장선만 공격하는 것을 제일로
했다고 합니다.
역사는 가정을 할 수 없는 영역이라서 그 당시 선조임금
께서 내리신 의사결정이 옳은 것인지 어떤지는 말할 수
없지만 지금의 잣대로 생각해 봐도 너무도 무사안일주의
혹은 무개념의 사고를 하시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왕세자를 세우기 전이라도 왕자들에게 국가 경영수업을
시키고 모범을 보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원칙들을 알려
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임금이기에
앞서 아버지로서도 해야 할 일들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 광해군은 임금이 되어서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하며 국가재건의 의지를 펼쳐 보였으나 끝까지
나라의 정사를 잘 돌보지 못한 원인은 이런 원칙과 기본이
몸에 배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리라 하고 생각해
봅니다.
글 이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