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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군량전쟁.....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3-01-09

조회 13,423



임진왜란은 군량전쟁.....

1593년 8월 13일(甲午).  본영에서 온 공문을 결재하여
보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혼자 배뜸 아래 앉아 있으니
온갖 회포가 어지럽다.  군관 이경복(李景福)이 장계를
받들고 가는 일로 출발하였다.  송두남(宋斗男)이 군량미
3백 섬과 콩 2 백섬을 실어왔다.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이 때는 한산도 해역에 머물고 있었으나 이순신은 늘
군량미를 걱정하여 전라좌수영 고을의 해안가를 개간
하여 자체적으로 조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조선수군과 피난민들이
굶주림에서 헤어날 수 있고 군량미 확보를 위하여 둔전
개간의 필요성을 장계를 통해서 역설하며 해결책을 모색
합니다.

육지에서는 명나라 군사들의 군량미와 마초 등을 구하느라
매일 매일이 군량전쟁이었습니다.  전쟁으로 초토화 된
나라에서 곡식을 생산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않는데 조정은
명나라 군사들을 위한 군량미를 어떻게하든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는 절체절명의 상황하에 놓이게 됩니다.

하물며 우리수군들의 군량미까지 내려보낼 생각은 엄두도
못냈겠지요. 곡식을 모으면 1차적으로 명나라 군대로 보내고
그 다음이 우리 군사들에게 그리고 그 다음이 백성들에게 돌아
가는데 언제나 썩은 곡식이나 상한 것뿐이었습니다.

사실 군량미 부족은 왜적보다도 명나라 군대 보다도 더
무서운 적이 되어 조선을 압박합니다만 왜적의 고니시
유카나가도 평양성을 함락 시키고도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던 것은 자국으로부터 들어오는 군수물자와 군량미를
조달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능한한 군량미
정도는 모두 현지 조달을 목표로 하고 나왔으나 조선수군에
의해 바닷길이 가로막혀 결국은 남쪽으로 철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군량전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극한의 참담한 상황속
에서도 조선수군은 이순신 막하에서 군사경영의 체계적인
관리하에 둔전을 일구며 군량미 소출을 피난민과 나눌 수
있었으니 백성들이 이순신 장군만 따라다니는 것도 무리는
아닌것 같습니다.

이렇듯 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해야 현실을
타파할 수 있는지 꼼꼼하게 따져보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이
바로 리더 입니다.  막연하게 군량미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군사 수가 얼마인지, 하루에 소요되는 군량은 얼마인지,
얼마나 비축해 놓아야 하는지, 유사시에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등 리더가 확인해야하는 현장의 숫자들 입니다.

이러한 현장의 숫자들은 군량미 하나라도 철저하게 준비
하고 잘 관리하였을 때 전쟁에서도 이길 수 있으며 싸우는
전투마다 이길 수 있다는 해답이 나온다는 것이 이순신
장군의 전략 입니다. 무슨 거창한 전술도 아니고 엄청난
프로젝트도 아니라는 것 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 그 밑바탕에 깔린 원칙과 기본,
그리고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진실된 행동 하나 하나가
승리를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송두남이 실어온
군량미가 말해 주고 있습니다.

글 이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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