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문도감에서 보고하였다.
동(童一元) 제독이 파견한 관리가 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동 제독이 진주를 친 다음 승리한
기세를 몰아 사천(泗川)까지 육박해 가자 동양(東陽)에
있던 적들은 싸우지도 않고 흩어져 달아나 버렸습니다.
드디어 새로 쌓은 성책을 진공하여 대포를 쏘아 성문을
깨트리고 대군이 들어가려던 순간 모(茅) 유격의 진영
에서 화약에 불이 붙었기 때문에 진중(陣中)이 소란하게
되었습니다. 왜적이 바라보고 있다가 문을 열고는 마주
쳐나오면서 대항하는 한편, 좌우로 매복하고 있던 적들이
사방에서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대군이 당황하여 도망쳐
흩어졌습니다. 죽은 사람은 거의 7~8천 명이나 되고
제독은 진주(晉州)로 퇴각하였습니다."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거북선이 처음 출전하여 승리한 이순신 장군의
사천해전과는 다른 정유재란 이후 1598년 10월 1일에
있었던 조.명연합군의 사천성 전투 입니다. 너무도
어이없게 무너져내린 싸움이었습니다.
조.명연합군의 사로병진작전에 의하여 명나라의
동일원 제독과 조선의 경상우병사 정기룡 장군이
사천성을 공격하면서 뜻하지 않게 명나라 진영의
화약고가 폭발하면서 많은 사상자를 내었습니다.
사천성 전투에 참전한 조,명연합군은 29,000여 명
이었으며 전사자는 8,000여명이었습니다. 이 때
왜적들은 전공을 확인 받기 위해 전사자의 귀와
코를 잘라 본국으로 보냈는데 전공을 부풀리기
위해 민간인들도 닥치는데로 죽였습니다.
왜적들은 조.명연합군 전사자들의 주검을 사천왜성
앞에 묻었는데 명나라 병사들의 무덤이라는 뜻에서
"당병무덤" 혹은 목잘린 병사들의 무덤이라는 뜻에서
"댕강무데기" 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며
잊혀지면서 그냥 조그마한 언덕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최근에 사천문화원 등에서 정비하여 "조명군총" 이라
하고 "조.명연합군전몰위령비"를 세우고 사천성 전투가
일어난 1598년 10월1일(음력)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30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습니다.
사로병진작전을 펼치며 지휘권은 명군이 쥐었는데
경상우병사 정기룡 장군은 신중히 공격하자고 건의
했으나, 명나라의 동일원 제독은 "왜군을 전멸시키고
아침밥을 먹자"며 정기룡 장군의 건의를 무시하였습니다.
사천성전투의 패배에서 배우는 교훈은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현장을 무시하는 연합군의 지휘체계, 적을
잘 모르는 교만한 장수, 갑자기 일어난 변수에 대한
위기 대처 능력 등 결국은 전쟁 당사자인 우리에게
뒷수습과 책임져야 할 일들만 남겨주었습니다.
왜 실패 할 수 밖에 없었는지, 나라면 어떻게 대처해
나갈것인지 신중하게 생각하고 따져 보는 것이 미래를
통찰하는 힘이 아닐까 생각 합니다. 역사에서 배우는
비지니스의 지혜, 총 한 방 쏘지 않으면서도 무역전쟁
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