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륙협공의 웅포해전....
1593년 2월 10일(乙未). 아침에 흐리고 늦게 개다. 오전 6시경(卯時)에 출발하여 곧장 웅천 웅포(雄浦 : 웅천면 남문리)에 이르러 보니 왜적의 배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두 번이나 꾀어내 보려고 했으나 진작부터 우리 수군을 겁내고 있었기에 나올 듯이 하다가는 도로 들어가 버려 끝내 잡아 섬멸할 수 없었다. 통분, 통분하다. 밤 2경(오후 10시경)에 영등포 뒤쪽에 있는 소진포(蘇秦浦 : 거제군 장목면 송진포리)로 돌아와서 배를 정박 시키고 밤을 지냈다.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한산대첩 때 이순신의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무덤까지 갔다온 일본 수군은 싸울듯 말듯 나오지 않습니다. 웅천왜성 등 해안가의 유리한 고지들를 점령하고 있으면서 농성을 하는 견디기 작전에 들어갔습니다.
웅천, 웅포는 지금의 진해 지역 입니다. 2월 10일부터 3월 6일까지 총 7차례에 걸쳐 왜적들을 경상우수군(원균) 과 전라우수군(이억기) 등과 연합하여 한 달간이나 바다 위에서 장기전을 펼친 웅포해전 입니다.
왜적들이 포구에서 나오지 않자 의승군들을 안골포와 제포에 상륙시킴으로서 적선을 반이나 쳐 부수고 완벽한 승리를 거둔 해전이자 상륙전을 최초로 시도한 수륙협공의 전투였습니다.
연합함대는 적선 51척을 당파, 분멸하고 2,500여명의 적군을 사살한 성과를 올렸으며 왜적들이 명나라와 강화 교섭을 하고 있는 시기에 이루어진 중요한 전투 로서 평양에서 쫒겨 내려온 왜적들이 서울의 철수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결정하도록 작용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웅포해전에서 보여준 이순신 장군의 전투 현장을 읽는 유연성, 그리고 발빠른 작전 변경과 명령이 군(軍)을 경영하는 연합함대 책임자로서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 주고 계십니다. 아직 삼도수군통제사 임명 전의 일인데도 말입니다.
오늘날 나라 안팍의 사정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강대국들로 둘러싸여 있는 우리나라는 현실을 직시하는 외교력과 그에 따른 경제력 그리고 군사력을 제대로 발휘하여야 하고 그에 따른 사고의 유연성은 두 말할나위도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사업에 성공했다고 해서 교만하지 말고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성공의 방식들을 고집이나 아집 으로 묶어서는 안되며 늘 변하는 글로벌 환경과 현장을 잘 살펴보고 따져보는 능력을 배양 하는 것으로 웅포 해전의 전투 과정을 보면서 배워야 할 것 입니다.
글 이부경 pklee95@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