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 20일 (乙酉).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영남 관찰사(김수)의 공문에
"적의 세력이 강성하여 그 칼날 앞을 아무도
당해 낼 수 없으니, 저들은 승리한 기세를 타고
마구 달리는 모양이 마치 무인지경에 들어온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전라좌수영에서)
전선을 정비해 가지고 와서 후원해 줄 것을
조정에 장계로 요청했다." 고 하였다.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영남 관찰사는 지위가 수군절도사인 원균이나
이순신보다 높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관할구역 밖의 다른 지역 장수에게 구원병을
요청할 때에는 직접할 수 없고 조정에 장계를
올려 조정의 승인을 받아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규정이 이러함에도 원균은 훗날, 자기가 이순신
에게 구원병을 요청 하였으나 이순신이 곧바로
달려와서 구해주지 않고 구원병 출동을 지체
시켰다고 모함하였고, 또한 원균의 이런 모함을
윤두수, 윤근수 등 서인들은 뒤에서 밀어주면서
이순신을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난중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장계를 올린 사람은
영남관찰사 김수였다는 사실과 구원병 출동이
아무리 급하더라도 기본과 원칙을 지켜야 했으며
비상시국에 우왕좌왕 하지 않고 침착하고 신중하게
대처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 바다인 경상도 앞바다에서 변란이 일어
났는데 이순신 장군인들 왜 빨리 출전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처음 접하는 적들의
동태와 정보를 수집하고 출전 준비에 박차를
가하며 조정의 명령을 기다렸으며 신중하게
전투를 한 결과 옥포대첩이라는 첫 승전보를
올리며 승승장구하는 해전을 기록하게 됩니다.
4월 13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조정으로
부터 4월 26일과 27일에 출동명령서가 잇달아
내려왔고, 5월 4일에야 출전한 것에 대한 의문을
뒷받침 하는 기록들을 읽으며 교훈을 얻습니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현장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인내와 신중함을 보며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글로벌 외교 전쟁, 국가 안보 전쟁,
경제 전쟁 등 국가 간의 문제와 각자 삶의 자리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가 무엇인지 서로 협력하고 연대
하며 실천하는 실력을 기르는 21세기에도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것 입니다.
글 이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