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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룡 장군과 사천성 전투.....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3-05-30

조회 13,106



정기룡 장군과 사천성 전투.....

정기룡 장군<br />
충의사.jpg
                                                경북 상주에 있는 정기룡 장군의 충의사

선조실록 1598. 10. 8(庚申)
군문도감에서 보고하였다.
동(童一元) 제독이 파견한 관리가 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동 제독이 진주를 친 다음 승리한
기세를 몰아 사천(泗川)까지 육박해 가자 동양(東陽)에
있던 적들은 싸우지도 않고 흩어져 달아나 버렸습니다.
드디어 새로 쌓은 성책을 진공하여 대포를 쏘아 성문을
깨트리고 대군이 들어가려던 순간 모(茅) 유격의 진영
에서 화약에 불이 붙었기 때문에 진중(陣中)이 소란하게
되었습니다.  왜적이 바라보고 있다가 문을 열고는 마주
쳐나오면서 대항하는 한편, 좌우로 매복하고 있던 적들이
사방에서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대군이 당황하여 도망쳐
흩어졌습니다.  죽은 사람은 거의 7~8천 명이나 되고
제독은 진주(晉州)로 퇴각하였습니다."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경북 상주시에 있는 정기룡 장군의 묘소를 참배하고
왔습니다. 고즈넉한 산기슭에 잠들어 계셨습니다.
거북선이 처음 출전하여 승리한 이순신 장군의 
사천 해전과는 다른 정유 재란 이후 1598년 10월
1일에 있었던 조.명연합군의 사천성 전투에 참전
하셨습니다.

조.명연합군의 사로병진작전에 의하여 명나라의
동일원 제독과 조선의 경상우병사 정기룡 장군이
사천성을 공격하면서 뜻하지 않게 명나라 진영의
화약고가 폭발하면서 많은 사상자를 내었습니다. 

사로병진작전을 펼치며 지휘권은 명군이 쥐었는데
경상우병사 정기룡 장군은 신중히 공격하자고 건의
했으나, 명나라의 동일원 제독은 "왜군을 전멸시키고
아침밥을 먹자"며 정기룡 장군의 건의를 무시하였습니다.
연합군 리더를 잘못 만난 아쉬움이 묻어나는 사천성
전투 입니다. 

정기룡 장군은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본관은 진주
(晋州), 자는 경운(景雲), 호는 매헌(梅軒)이었으며 
기룡이라는 이름은 선조 임금께서 꿈을 꾸시고 친히 
하사 하셨다고 하는 임진왜란 때 육전에서 크게 활약
했으며 명나라 장수 마귀는 조선 제일의 장수로 
꼽았다고 합니다.

경남 하동군에는 생가와 경충사(景忠祠)가 경북 
상주시에는 묘소와 충의사(忠毅祠)가 있어 그의 
충절을 기리고 있으며 광해군 때에 제15대
(1617. 04~1619. 09), 제17대(1621. 04~1622. 02) 
두 번이나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한 국방을 지키는
최전선에서 용맹스러운 전과를 올리셨습니다.

사천성전투의 패배에서 배우는 교훈은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현장을 무시하는 연합군의 지휘체계, 적을
잘 모르는 교만한 장수, 갑자기 일어난 변수에 대한
위기 대처 능력 등 결국은 전쟁 당사자인 우리에게
뒷수습과 책임져야 할 일들만 남겨주었습니다.

왜 실패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신중하게 생각하고 
따져 보는 것이 미래를 통찰하는 힘이 아닐까 생각 
합니다. 역사에서 배우는 비지니스의 지혜, 요즈음
같은 신냉전 시대에서 총 한 방 쏘지 않으면서도 
글로벌 무역전쟁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글 이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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