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전투와 임란 북천 전적지.....
...(前略)... 적군이 이일은 급하게 쫓으니, 이일은 말을 버리고 옷을 벗어버린 채로 머리털을 풀어 헤치고 알몸뚱이로 달아났다. 문경에 이르러 종이와 붓을 찾아 패전한 상황을 임금께 빨리 아뢰고 물러나서 조령을 지키고자 하였다가, 신립이 충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충주로 달려갔다.
- 이재호 옮김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 - 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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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임란 북천 전적지
1592년 음력 4월 17일 아침에 왜군의 침략 보고가 처음으로 도성에 도착하였고 조선 조정에서는 이일 (李鎰)을 순변사로 삼아 중도(中道)로 내려 보내어 수비하게 하였습니다.
한양에서 중앙군 60여명을 데리고 4월 24일 상주에 도착하였는데 도중에 모집한 우리 군사가 오합지졸 이었고 진을 펼치기도 전에 왜적이 갑자기 포를 쏘아대며 교전을 하였으나 모두 궤멸하고 말았습니다.
조선의 병역 시스템에도 문제가 많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며 상주에 도착하자 왜적들이 벌써 침입했다고 전하는 척후병을 유언비어를 퍼트린다며 죽이는 순변사 이일의 오만한 자세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란북천전적지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중앙군과 왜군의 주력부대와 회전하여 900여명이 순국한 호국의 성지 입니다. 상주 판관 권길, 박걸이 모집한 900여 명이 17,000명의 왜병과 분전한 곳이며 이곳에 충렬사를 건립하여 윤섬, 권길 등 무명용사들의 위패를 배향하고 있습니다. 호국의 달을 맞이하여 순국선열들을 기립니다.
이에 역사에서 배우는 교훈, 국방을 소홀히 하는 민족은 반드시 큰 어려움을 당하며 국방을 리더는 오만(hubris)한 자세를 버리고 평소에 군사 훈련은 물론 과거에 성공했던 전략이라 하더라도 다시 한 번 현실에 맞게 다시 따져보는 치밀함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글 이부경 올림 pklee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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