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으로 피난가고 있는 상태에서 왜적에게 빼앗긴 한양성을
되찾기 위해 전라감사 이광은 전라도의 각 군현에 명령을
내려 4만명을 모집하여 경상도순찰사 김수, 충청도순찬사
윤선각과 함께 온양에 집결하여 6월 3일에는 수원 독산성에
입성합니다.
이에 놀란 왜군은 용인으로 도망가고 그 뒤를 밟아 이광이
먼저 왜적을 공격하였는데 왜군은 한양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구원병과 함께 불과
1,600명의 군사로 기습공격 하였습니다.
이에 선봉장 백광언과 이지시가 총탄에 맞아 죽자 군사들은
사기가 떨어져 광교산으로 후퇴하고 그 다음날 아침 왜군의
척후대가 기습공격하자 5만명의 대군이 일시에 무너졌다고
합니다.
왜군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기마대는 현재의 경기대학교
후문의 기슭을 타고 내려와 광교산 일대의 조선군을 공격한
것으로 추정 됩니다. 조선 관군이 주둔했던 상광교 13번
버스종점에서 시루봉까지 올라가서 보니 역사의 현장은
아담한 분지로 되어 있지만 군사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요충지로 보였습니다. 서울로 가는 길목으로 서울을
방어하는 제일의 관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척후병도 안보냈는가? 광교산으로 후퇴하였다면
작전회의는 하지 않았는가? 훈련 안된 백성들로 구성된
군대(민병대)로 정규군인 왜적과 전쟁을 치룰것이라고
생각했는가? 전쟁을 수행할 조직은 갖추어져 있었는가?
5만명을 통솔할 책임있는 리더는 있는가? 정보 수집은
제대로 했는가? 등등의 의심들이 꼬리를 뭅니다.
역사책에 아주 조그맣게 소개된 용인전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면이 많습니다. 오합지졸의 수치스러운 전투를
잊으면 잊혀집니까? 두 번 다시 이런 경우를 만나지
않으려면 뼈를 깍는 아픔으로 역사를 공부해야 합니다.
유성룡 대감이 징비록을 쓴지 40년도 안되어 병자호란때
쌍녕전투가 같은 장소에서 용인전투와 똑같은 양상으로
전개 되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역사를 잊으면 미래도 없습니다. 현재를 타개해 나갈
방향을 찾지 못합니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아라." 며
어릴때부터 역사 교육을 시키는 이스라엘의 지혜로운
교육방법도 한 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글 이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