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년8월2일(庚申). 잠깐 개었다. 혼자 수루에 앉아 있으니 회포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비통한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이날 밤 꿈에
왕명(王命)을 받게 될 조짐이 보였다.
1597년8월3일(辛酉).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梁護)가 교서(敎書)와
유서(諭書)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것은 곧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임명한다
는 것이었다. 교서와 유서에 숙배를 올린 후 서장(書狀)을 받았다는
회답 장계를 써서 봉해 올리고, 그날로 출발하여 곧장 두치(豆峙)를
경유하는 길로 올랐다. 초저녁에 행보역(行步驛 : 하동군 횡천면 여의리)
에 이르러 말을 쉬고, 자정이 넘어서 다시 길을 떠나 두치에 이르니 날이
밝으려 하였다. - 후략 -
- 난중일기 - 에서 발췌
원균이 왜적에 패하여 전 조선의 수군을 바다에 침몰시킨 것은 7월16일
이고, 선전관 김식(金軾)에 의해 이 소식이 조정에 전해진 것은 7월22일
입니다. 급보를 받은 선조는 긴급 어전회의를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하고,
7월23일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는 교서를 내렸는데,
이순신에게 도착한 것이 8월3일 입니다.
읽어 볼수록 화가 나는 대목 입니다만 갑자기 만난 위기상황을 대처해
나가는 그 당시 최정상에 있었던 TOP리더들의 모습이 잘 보입니다.
누란의 급박한 현장에 있는 이순신의 적극적이고도 현실적인 대처방안과
최고통수권자의 선조와 조정의 신속하고 이기적인 의사결정이 눈에 띕니다.
한 인간의 자존심을 다 버리고 오직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이 있었기에
4개월 전의 수모도 굴욕도 다 가슴에 묻고, 군사도 없고 군기도 없이,
교서 한 장뿐인 삼도수군통제사를 다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개인 이순신이기 이전에 리더로서 조선수군의 총책임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직(職)보다는 업(業)을 먼저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백의종군의 불편하신 몸으로 부하들과 함께 밤을 새워 왜적들과 조우
할지도 모르는 일촉즉발의 연해안을 살피며 직접 보고 듣고 한 연후에
대책을 세우시는, 다시 시작 하시는 디테일(detail)한 모습에서 우리는
진정한 리더의 모습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한산대첩일 때도 칠천량해전 후에도 이순신 제독의 언제나 최전선에서
솔선수범 하는 자세로 부하들과 함께 하시는 모습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전하는 메세지가 너무도 큽니다. 절대로 지휘봉을 내려 놓아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Never ever give up!! CEO 여러분! 다시 시작 합시다.
임직원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다시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