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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진주성 전투의 최후 (2011. 8. 22)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1-08-22

조회 22,669



제2차 진주성 전투의 최후


29일에는 동문 쪽의 성이 비에 허물어지니 적들이 개미떼
처럼 기어 올라왔다. - 중략 –
적들이 드디어 성 위에 올라 무력을 시위하자 성가퀴를
지키고 있던 군사들은 흩어져 촉석루로 들어가고 서예원은
먼저 달아나 숨어버렸다.


김천일이 최경회, 고종후 등과 함께 마루에 벌려 앉아
말하기를 “여기가 우리들이 죽을 곳이다.” 라고 하면서
술을 가져오게 하였으나 술을 가진 자가 벌써 달아
났으므로 불을 놓게 하고 스스로 타 죽으려 하였으나
적들이 곧 다락에 올라왔다.


김천일이 자기 아들 상건과 최경회, 고종후, 양산숙
(梁山璹)등과 함께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강에
빠져 죽었다. 이종인은 돌아서서 적과 싸우면서 남강까지
나가 양 옆구리에 왜적을 하나씩 끼고 강에 뛰어들면서
고함치기를 “김해 부사 이종인이 여기서 죽는다.”라고
하였다. 진사 문홍헌(文弘獻), 정자(正字), 오자(吳玼),
참봉 고경형(高敬兄)도 다 따라 죽었다.


성이 함락된 다음 적들이 사람들을 마구 죽였으므로
서예원과 판관 성여해(成汝楷)도 죽음을 면치 못했고
여러 장수들도 다 죽었다. 김준민은 단신으로 말을
달려 골목에서 싸우며 좌우로 나가면서 치니 많은 적들이
쓰러졌다. 적들이 종일토록 쫓아다녔으나 총알도 맞히지
못하고 칼로도 베지 못하였는데, 결국 어디에서 죽었는지
모른다.


성안의 남녀들이 물결처럼 강으로 밀려가 빠져 죽으니
시체가 강을 메우고 떠내려갔다. 죽은 사람이 약 6~7만
명이나 되며 죽음에서 벗어난 장사는 두세 명뿐이었다.
적들이 성을 허물고 불태웠으므로 온 성이 폐허로 되고
말았다. – 후략 -


- [선조수정실록, 1593년 6월] – 에서 발췌


진주성 촉석루에 다녀왔습니다. 바다의 조선 수군과는
달리 육지에서의 참혹한 임진왜란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냅니다. 진주성 전투는 1차(1592. 10. 5)
에서는 크게 이기며 방어합니다만 2차(1593. 6. 21)에서는
그만 함락 되고 마는 마지막 장면 입니다..


리더들이 죽음이 돋보입니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며
순국하신 충무공 이순신 제독,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도망가다가 죽임을 당한 원균 장군, 진주성 대첩을 이루시
고 왜적의 총탄에 돌아가신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 제2차
진주성 전투 함락 때 여러 장수들의 애절한 마지막 죽음
들이 가슴을 도려내듯 아련하게 저려옵니다.


웰빙(Well-Being)이 아니라 웰다잉(Well-Dying)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리더일수록 평소에 웰다잉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생물학적인 웰다잉 만의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나의 소임을 다하고 직(職)을 떠날 때, 일생을 바쳐온
업(業)을 떠날 때, 마지막까지 유종의 미를 다하는 웰다잉
의 마음가짐은 비록 리더들만의 문제이겠습니까마는….


리더는 마지막 지휘봉을 놓는 그 순간까지 아니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과 가문과 나라의 명예를 위해서 나의
존귀한 자존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회사 경영이나
비즈니스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이제는
리더의 덕목이 아닌 전략과 지침이 되었습니다.


이부경 올림
010-2228-1151 / pklee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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