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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현장 생중계 (2012. 04. 09)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2-04-12

조회 22,395



임진왜란 현장 생중계


1592년4월15일(甲辰). 맑다. 나라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순찰사에게 보내는 답장과 별록을 써서, 곧바로 역졸을 시켜 달려
보냈다. 해질 무렵에 영남우수사(元均)가 통첩을 보냈는데, “왜선
90여 척이 와서 부산 앞 절영도(絶影島)에 정박했다.”고 한다.
이와 동시에 또 수사 (경상좌수사 朴泓)의 공문이 왔는데, “왜선
350여 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이미 도착했다.”고 한다. 그래서
즉시 장계를 올리고 겸하여 순찰사(이광), 병마사(최원), 우수사(이억기)
에게도 공문을 보냈다. 영남관찰사(김수)의 공문도 왔는데 역시 같은
내용이었다.

1592년4월16일(乙巳). 2경(밤 10시쯤)에 영남우수사(元均)의 공문이
왔는데, “부산(釜山)의 거진(巨鎭)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한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가 없다. 즉시 장계를 올리고, 삼도(三道)에 공문을
보냈다.

- 노승석의 [이순신의 난중일기 완역본] – 에서 발췌

드디어 올 것이 왔습니다. 1592년4월13일 부산진 공격을 시작
으로 이순신에게 임진왜란 발발의 소식은 4월15일에 전해 집니다.
부산 첨사 정발(鄭潑)이 싸우다 죽었고,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이
동래성을 지키다가 죽었습니다.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당장 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은 우수영을 불태우고 한 척의 배만 타고 사천 포구로
피해 갔습니다. 또한 경상병사 이각(李珏)은 첩부터 대피 시키고
무명 1천 필을 가지고 도망갔습니다.

이순신은 관내 10개 기지에 비상령을 내리고, 전라감사와 병사,
전라우수사 등에게 공문으로 알리면서 이 모든 조처 내용을 조정의
비변사에 보고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그 때의 현장 상황입니다.

전쟁에 임한 장수들의 초기 대응자세가 각기 다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최전선의 장수들이 어떻게 순발력 있게
초기대응 하느냐에 따라서 전쟁의 판세가 달라지며 나라의 운명도
좌우 됩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지휘관이 허둥지둥 하거나 제대로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는 것은 평소에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선진국이 되고 노령화 사회에 접어 들면서 복지사회의 문제 특히
우리나라는 남북통일의 문제 등 언제든지 갑자기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을 키우고 평소에 잘 준비하여 어떠한 일이
발생하더라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리더의 역량을 지금부터라도
키우는 것이 제일의 방안이라고 생각 합니다.

리더를 꿈꾸는 사람은 남보다 부지런하고 끊임없이 학습하고 항상
준비하고 …. 다 아는 사실이지만 실천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자! 당장 지금부터라도 시작 합시다. 시작이 반이니까요…..

글 이부경
010-2228-1151/pklee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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