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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끔찍했던 부역자들의 말로!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2-10-22

조회 22,354



너무나 끔찍했던 부역자들의 말로!


1597년10월22일(기묘).  아침에 눈이 오고 늦게 개었다.  장흥부사와 같이

식사를 했다.  오후에 군기시(軍器寺) 직장(直長) 선기룡(宣起龍) 등 3명이

유지(有旨)와 의정부의 방문(榜文)을 가지고 왔다.  해남현감 유형이 적에게

붙었던 윤해(尹海), 김언경(金彦京)을 결박하여 올려 보냈기에 나장(羅將)이

있는 곳에 단단히 가두어 두도록 하였다.  무안현감 남언상(南彦祥)은 가리포의

전선에 가두었다.  우수사가 황원에서 와서 김득남을 처형하였다고 했다.

진사 백진남이 와서 만나고 돌아갔다.


1597년10월23일(경진).
  맑음.  늦게 김종려(金宗麗), 정수(鄭遂)가 와서 만났다. 

배조방장(경남)과 우후(이의득), 우수사우후(이정충)도 왔다.  적량 영등포 만호가

잇따라 왔다가 저녁에 돌아갔다. 이날 낮에 윤해(尹海), 김언경(金彦京)을 처형했다. 

대장장이 허막동(許幕同)을 나주로 보내려고 밤 9시경에 종을 시켜 불렀더니 배가

아프다고 했다.  전마(戰馬)의 떨어진 편자를 고쳐 박았다.


-  노승석의 [이순신의 난중일기 완역본]  -  에서 발췌



임진왜란의 기록으로 이순신의 난중일기, 유성용의 징비록, 오희문의 쇄미록 등

전쟁과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비참하기 이루 말 할 수 없는 참상의 증언들로

가득합니다. 특히 오희문(吳希文)은 조선중기 학자로서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쇄미록

이라고 하는 약10년 간의 피난 일기를 남겨 놓았는데 그 내용을 잠깐 소개하면...


"거리 곳곳 집집마다 시신이 쌓여 있는 것을 처참하여 차마 볼 수 없었다고

하니 이는 필시 정월 24일 분탕질을 할 때  피살된 사람들이다. 이들 죽어간

사람은 처음에 도성을 나가지 않고 왜적에게 잘 보여 이득을 추구하며 인가에

묻거나 방치된 물건을 모두 파서 훔쳐다가 자기 집에 쌓아 두고, 술과 음식을

배불리 하고 스스로 잘살아 보려는 계책을 세웠으며 뒷날에 근심을 생각하지

않다가 필경 모두 도살당한 것이니 이것은 모두 스스로 취한 것이라 누구를

허물하고 누구를 원망 할 것인가.  - 도현신의 [이순신의 조일전쟁] - 에서 발췌



침략자인 왜군을 도운 매국노와 배신자들은 의외로 많았으며 임해군과 순화군을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준 국경인을 비롯하여 성세령과 함숭덕 등 고관과 무관들도

왜군에 협력 하였습니다. 제나라를 버리고 남의 나라에 빌붙은 자들이니 왜군들도

무자비하게 학살했습니다.


이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원칙이 없고 그 때 그때 임시변통으로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전쟁에 질것 같으면 왜적에게 붙었다가 전쟁의 양상이 바뀌어 지면 제 나라에

이런 이중적인 잣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내려진 형벌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확고한 원칙주의와 엄격한 신상필벌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탈영을

하거나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친 사람들 그리고 적에게 붙었던 자들은 가차없이

처형합니다. 이순신은 전쟁의 경영원칙이 있었기에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는 매국노나 배신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철저한 기록정신으로 남겨진 난중일기에서 배우는 원칙중심의 리더십 입니다.


글 이부경
010-2228-1151/pklee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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