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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왜적을 쳐부순 장계(釜山破倭兵狀)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3-01-27

조회 22,112



부산에서 왜적을 쳐부순 장계(釜山破倭兵狀)


삼가 적을 불태워 죽인 일로 아뢰나이다.
-  (중략)
다대포해전 : 9월1일에는 닭이 울 때 출발하여 오전 8시경(辰時)에 몰운대를
지나자 갑자기 동풍이 불면서 파도가 거세게 일어 배를 부리기가 어려웠습니다.
화준구미(花樽龜尾)에 이르러서 왜적의 큰 배 5척과 맞닥뜨렸고, 다대포(多大浦)
앞바다에 이르러서는 왜적의 큰 배 8척과, 서평포(西平浦 : 부산시 구평동) 앞바다에
이르러서는 왜적의 큰 배 9척과, 절영도(絶影島)에 이르러서는 왜적의 큰 배 2척과
마주쳤는데, 이들은 모두 기슭에 줄지어 정박해 있었으므로, 3도 수사가 거느린
여러 장수들과 조방장 정걸(丁傑)등이 힘을 합쳐 왜적의 배들을 남김없이 때려
부쉈습니다.  _  (중략)  -
부산포해전 : 우부장인 녹도 만호 정운, 거북선의 돌격장인 신의 군관 이언량,
전부장인 방답 첨사 이순신, 중위장인 순천 부사 권준, 좌부장인 낙안 군수 신호 등이
앞장서서 곧장 달려가서 왜적의 선봉의 큰 배 4척을 때려 부수고 불태워버렸습니다. 
적도들은 헤엄을 쳐서 뭍으로 올라갔습니다.  -  (중략)  -
녹도만호 정운(鄭運)은 변란이 생긴후로 충의심이 불타올라 적과 함께 죽기를
원한다고 맹세하면서 세 번 왜적을 칠 때 매번 앞장서서 돌진하였는데, 부산에서
맞붙어 싸울 때에도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 하다가 적의 큰 철환이 이마를 꿰뚫어
전사하였는바, 지극히 참통(慘痛)합니다.    -  (후략)  -

-  박기봉의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어제 몰운대의 정운 장군이 모셔진 사당을 둘러 보러 갔습니다.  군부대 안에 있어서
일년에 한번 다대포해전 기념일(9월1일)에만 일반인에게 공개 한다고 합니다. 
아쉬운 발길을 돌리면서 그 분의 애국 충절과 이순신의 부하로서의 팔로워십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부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는 정운 장군이 마치 원균의 사람으로 사사건건 이순신에게
항거하는 인물로 그려져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보다도 이순신 제독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호흡이 맞았으므로 죽음도 불사한 가장 든든한 참모의 역활을 다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녹도 만호 정운은 기개가 높고 의협심이 강하여 이순신의 팔로워로서 리더가 지향하는
목표에 충성을 다하고 그 충성에서 비롯된 신뢰를 바탕으로 바른말을 하여 궤도 수정을
할 수 있는 그런 참모 였습니다.  옥포해전을 나가기 전에 이순신에게 직언으로 진격을
독려하는 모습에서 그의 올바른 비판능력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비판과 반항을 구별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사물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판력은 자신의 사고를 토대로 올바르게 행동하려는 힘 입니다. 
비판하지 않고 그냥 충성심 하나로만 리더를 섬기는 팔로워가 될것인가?  아니면 리더와의
의견을 좁히고 조율하려는 노력으로 건전한 비판력을 가진 참모가 될것인가?. 생각해 볼 일
입니다.

나는 어떤 팔로워인가?  리더에 충성심이 강한 좋은 부하인가?  비판이라는 논리를 앞세워
비난으로 리더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는 부하인가?  때로는 격렬하게 리더와 부딪치면서도 
충성심을 발휘하는 조직에 공헌하는 부하인가?

이순신이 23전23승 할 수 있었던것은 아마도 훌륭한 참모진들을 잘 거느린것이 아닌가?
정운 장군 같은 훌륭한 팔로워들의 도움이 없이 어떻게 전투를 치루어 낼수 있겠습니까? 
어제도 그랬지만 다대포항의 파도는 너무도 심하게 일어 그 당시 판옥선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텐데 녹도 만호 정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순신의 지시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정운은 이순신의 가장 믿음직한 팔로워로서 책임을 다했습니다.

글 이부경
010-2228-1151/pklee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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