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산성 전투
선조실록(1593. 2. 24), 선조수정실록(1593. 2.) 에서
- (前略) - 전라도 순찰사 권율은 자기의 군사를 갈라서 4천명은 절도사 선거이(宣居怡)로 하여금 통솔하여 양천강 언덕에 진을 치게 하고, 자신은 정예병사 2천3백 명을 통솔하여 수원 독성(禿城)으로부터 고양의 행주산성으로 옮겨가 진을 쳤다.
2월12일 동틀 무렵 망을 보던 군사가 알리기를, ....권율이 곧 군사들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하고...... (중략)
적들이 부대를 나누어 번갈아 공격해 오자 오전 6시경에서 오후6시경까지 안팎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우리 군사는 높고 가파른 곳을 차지 하였는데, 뒤에는 강가의 절벽이 잇대어 있어서 도망쳐 달아날 길이 없었으므로 모두들 죽을 각오를 하였다. 적들은 위를 향해 공격하느라 총알이 바로 날아가지 않았지만, 호남에서 온 건장한 군사들은 모두 활을 잘 쏘기 때문에 쏘는 족족 다 맞는데다가 화살이 비 오듯 하였으므로 적들은 그때마다 쓰러졌다...... (중략)
이튿날 사대수가 싸움터에 와서 보고 말하기를 "외국에 진짜 장군이 있구나." 라고 하였다. 송 경략(宋應昌)은 공문을 보내어 위로하고 고무하였으며, 비단과 은으로 사례하고 황제에게 보고하니, 홍로시의 관리를 우리나라에 보내어 지시하기를 "조선은 본래 강한 나라로 소문 났었다. 이번에 권율이 적을 많이 벤 것을 보면 그 나라의 백성들은 여전히 떨쳐 일어날 수 있을것이니, 나는 매우 대견하게 생각한다." 라고 하였다. ... (후략)
- 박기봉의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1593년 계사년 2월12일에 행주대첩이 있었습니다. 행주산성에서의 믿을 수 없는 승리는 권율 장군의 철저한 방어 준비와 지휘(리더십) 때문이었습니다. 3만명이 넘는 일본군을 10대1도 안되는 전력 차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승리 하므로서 우리를 쉽게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각인시켜 줍니다.
부대를 적절히 나누어 배치하고 응원케 한 전략전술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권율 장군은 2월16일 부하들과 함께 행주산성을 나와 병력을 파주산성으로 도원수 김명원의 부대와 합류하여 한양의 일본군의 재차 침입에 대비합니다.
적과의 전투를 목전에 두고 그 성패를 예측하는 능력으로 진퇴를 분명히 하는 권율 장군은 최초로 참전한 용인전투에서 대패하자 자기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온전히 원대복귀했으며 2차 금산전투에서의 조헌과의 협동작전약속도 연기하였고, 1593년6월 진주성 전투 때에도 참전을 기피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세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이치전투와 행주산성전투는 기필코 승리를 거두어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커다란 기여를 합니다.
권율 장군은 1537년 영의정을 지낸 권철의 막내아들로 강화도 연동에서 태어났으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싫어하였다고 합니다. 벼슬에 관심이 없고 과거는 응시할 생각도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46세의 나이에 과거를 치러 관직에 나아갔으며 임진왜란때에 유성룡에 의하여 천거 되었습니다.
바다에서는 이순신 제독이 육지에서는 권율 장군이 카리스마 리더십을 발휘합니다. 이순신 제독은 세계해전사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전략가로서 일본군조차도 본받기를 주저하지 않는 반면 권율 장군은 군 최고 지휘관인 도원수가 되어 전쟁의 전체 상황을 파악하고 전략을 구상하고 군무를 주도하며 현장의 총사령관으로서 국난을 이겨냅니다.
기업을 경영 하는데 있어서도 조건이 좋은 프로젝트를 추진할때도 있고 상황판단을 신중히 하여 사업을 철수 하거나, 보류하거나, 힘을 합하는 연합공동체 전략이 필요 할때도 있습니다. 결국 이겨야만 생존 할 수 있다는 것은 기업경영이나 전쟁이나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글 이부경 010-2228-1151/pklee95@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