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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의 울돌목을 막지 못하고!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3-04-14

조회 21,395








육지의 울돌목을 막지 못하고!


저녁때에 변경에서 띄운 급보가 서울에 도착하였다.
즉시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임명하여 정예병을 이끌고 상주(尙州)에
내려가 적을 막도록 하였으나 패하여 종사관 박지, 윤섬 등은 다 전사하고
이일은 혼자 말을 타고 달아나서 죽음을 면하였다.  

 -  선조실록 (1592. 4. 17(丙午))  - 에서 발췌

적군이 충주에 쳐들어와 신립이 패전하여 죽었다.  (중략)
김여물이 말하기를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어서 적의 칼날과 맛서기는 어려우니
이 험하고 좁은 목을 지켜 막아야 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으며, 또 높은 언덕에
의지하여 맞받아치자고 하였으나, 신립은 듣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여기에서는
기병을 쓸 수 없으므로 들판에서 한번 싸워야겠다." 라고 하였다.  (중략)

적이 나팔을 세 번 불고 일시에 내달려 치자 신립의 군사는 크게 무너지고 적은
벌써 사방으로 포위하였다.  신립은 진 친 곳으로 도로 달려 들어가고, 사람들은
저마다 물에 뛰어드니 시체가 강을 뒤덮고 떠내려갔다.  신립과 김여물은 말을
달리면서 적 수십 명을 쏘아 죽인 다음 물에 빠져 죽었다.  (후략)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전서,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  에서 발췌


어제 왜군 제1선봉장이 되어 조령을 넘어 보았습니다.  금방이라도 매복된 군사들이
산을 타고 내려와 덮칠것 같은 험준한 산세에 길도 험했습니다.  걸어가면서 이런곳을
왜 지키지 않았을까?  여기야말로 육지의 울돌목인데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제1관문, 제2관문, 제3관문, 어느곳을 택했어도 승산이 있었을만한 장소였습니다.
왜적들이 갑자기 쳐들어와 순식간에 남쪽의 부산, 동래 등 성이 함락 되었다 하더라도
조령에서 한 번쯤은 맞붙어야 하는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에 통분했답니다.

장수(리더)라면 지형지물을 이용하고 부하들의 의견이나 정보를 검토하고 척후병을
운영하는 전쟁의 기본 중의 기본을 왜 하지 않았을까?  신립의 탄금대 전투는 정말
의문이 많습니다.  기병은 말에서 내리면 보병이 되는것 아닙니까? 

험한 산길을 걸으면서 아무리 전쟁이라고는 하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연한
사고도 경직되어 있는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 없었습니다. 나라면 어떤 작전을 세웠을까
하고 함께 한 회원님들과 의견도 나누며 우리들의 리더십을 재점검해 보았습니다.

탄금대는 신라시대  악성 우륵이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하던 곳이고 우리나라 국악의
발상지라고도 하는 경치 좋은 한강변의 언덕이었는데 지금은 칠천량 패전과 함께
임진왜란의 패전지로서 더 많이 알려져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우리가 탄금대에서 왜적을 맞아 무찌르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져내린 실패의 교훈은
경청해야 한다는것, 리더는 절대 교만해서는 안된다는것, 어떤 정보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것,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연한 사고를 가지는것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두번 다시 이 땅에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며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 바친
이름모를 조선의 장병들을 위하여 팔천 고혼 위령탑 앞에서 묵념을 하며 다짐해 봅니다. 
우리는 21세기에 걸맞는 리더로서 대한민국을 지키는 책임과 의무를 다할것을 맹세합니다.

글 이부경
010-2228-1151/pklee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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