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8경 가운데 제4경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2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 4월 17일 국보 제304호로 승격
전라좌수영의 본영으로 사용하던 곳 충무공 이순신 당시에는 '진해루'라는 누각이 있었으나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소각되고 1599년(선조32)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시언이 전라좌수영 거눌로 75칸의 객사를 지어 '진남관'이라 명명하였다. *남쪽(왜)을 제압하라는 의미
이후 1716년(숙종42)에 다시 불에 타버린 것을 1718년 전라좌수사 이제면이 다시 건립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1910년(순종4)부터 50여년 동안 여수공립보통학교, 여수중학교, 야간상업중학원 등의 학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크기는 정면 15칸, 측면 5칸, 건평 240평(약 780㎡), 총 68개의 기둥으로 현존하는 지방 관아 건물로는 제일 크다
한국 목조건축의 기둥은 기둥머리, 기둥몸, 기둥뿌리의 크기에 따라 3가지로분류된다. (3가지가 동일한 원통기둥, 기둥몸이 가장 큰 배흘림기둥, 기둥뿌리가 가장 큰 민흘림기둥) 진남관은 2.4m 둘레의 민흘림기둥으로 되어있으며 이런 기둥은 해인사 응진전, 화엄사 각황전, 수원 장안문에서 볼 수 있다.
진남관의 기둥도 주초를 다듬지 않고 자연 그대로 세웠다. 이를 '덤벙주초'라고 한다. 이는 세종 때 칙령에 의거하여 돌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요하게 만든대서 비롯된다. 또한 더벙주초 위에 기둥을 수직으로 세우려면 주초의 면과 동일하게 기둥을 다듬어야 하는데 이를 '그랭이질'이라고 한다.
진남관 옆에서 진남관을 바라보고 있는 '여수석인' 1972년 8월 7일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李舜臣)이 거북선 등의 조선(造船)이 한창일 때 왜적들의 공세가 심해지자 침공을 막아내기 위하여 석인을 만들어 세워 의인전술(擬人戰術)로써 승전을 이끌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석조물. 원래 7구의 석인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6구는 없어지고 현재 1구만 남아 있다.
'석주화대' 밤에 불을 밝히기 위해 세운 돌기둥 이순신장군이 휘하의 수군들이 야간 수련을 할 때 사용하였다고 한다. (1592년 2월 3일 일기에 "오늘 저녁에 화대석 4개를 시어 올렸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당시에는 4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2기만 남은 상태 원기둥으로 보이지만 원래는 8각기둥이었다. 재질이 사암이라 마모가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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