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실천
이순신 장군은 일평생 정의를 실천함에 있어, 조금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무관으로서 항상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였으며, 옳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상관이나 권력자에게도 서슴없이 오류를 지적하는 직언을 하였다. 비록
이로 인해 여러 차례 불이익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늘 정의를 삶의 핵심가치로 삼고 온전히 실천하였다.
정의를 실천함에 있어 장군은 타인보다 본인에게 더 엄격하였다. 다음 글은 1593년 웅천포 해전을 마치고 귀환하던 중 통선
1척을 잃은 것에 대해 장군 스스로 죄를 청하는 장계의 한 부분이다. 사실 이 통선이 전복된 원인은 부하장수들이 장군의
지휘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나 장군은 지휘관으로써 본인의 책임을 물은 것이다.
통선(統船) 1척을 마침내 전복시켜 많은 죽음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신이 군사 쓰는 방법이 좋지 못하고
지휘가 잘못된 때문인바, 극히 황공하여 거적자리에 엎드려 죄를 기다리나이다."
-통선일척경복후대죄장(1593.4.6)
또한 장군은 해전에서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부하장수들에게 골고루 주고, 이를 엄격히 평가하여 해전의 상황을 아뢰는
장계에 상세히 기록함으로 각자 공적에 따라 공정한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또한 당시 천대받던 여러 분야의 기술자
들까지도 고루 기용하고, 이들의 공을 높이 평가하였다.
"신의 군관 정사준이 묘한 법을 찾아내어 대장장이 낙안 수군 이필종, 순천 사삿집 종 안성, 피난하여 본영에
와 사는 김해 절의 종 동지, 거제 절의 종 언복 등을 데리고 정철(正鐵)을 두들겨 만들었는데 그 체제도 잘 되었고 총알 나가는 힘도 조총과 꼭 같습니다."
-봉진화포장(1593.8.10)
1593년 8월 일본의 조총과 조선의 승자총통을 개량하여 정철총통을 제작을 아뢰는 장군의 장계에는 군관 정사준을 비롯하여 대장
장이와 천민인 종들의 이름까지도 세세히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장군은 일평생 본인의 신념에 따라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의로써 타인을 평가하기에 앞서 장군 스스로
온전히 정의를 실천하는 솔선수범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장군의 모습은 구국의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는 밑바탕이 되어준
동시에, 장군의 업적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 창의정신
창의력은 21세기의 핵심 가치이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계의 역사를 이끌어온 많은 리더들은 이미 훌륭한 창의력의
소유자들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16세기 이순신 장군 역시 뛰어난 창의력을 지닌 리더였다. 거북선을 비롯한 장군이 제작한 여러 무기들,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뛰어난 해전술, 군경영을 위한 작은 아이디어 하나까지 모두가 장군의 기발한 생각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거북선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413년 태종 때이지만, 180년 후 임진왜란을 위해 재탄생된 거북선과는 구조나 그 성능 면에
있어 많이 다른 것이었다. 다음은 1592년 6월 2일 당포해전의 전황을 아뢰는 장계에 묘사된 거북선의 모습이다.
"앞에는 용머리를 설치하여 그 입으로 대포를 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게 했습니다. 그래서 비록 수백 척의 적선 속이라 하더라도 돌진해 들어가서 대포를 쏠 수 있게 했는데, 이번 출동에는 돌격장이 타고 왔습니다."
-당포파왜병장 1592.6.14
돌격전투함 거북선은 우수한 조선의 판옥선을 기반으로 일본과의 해전에 가장 적합하도록 설계되었다. 전투 시 적진에 돌격하여
적의 진영을 무너트리고, 사방에 탑재된 포를 자유자재로 쏘아댐으로 일본함대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었다. 일본군은 이 같은
거북선을 맹선(눈먼배)이라 부르며 무척 두려워하였다.
이후로 계속되는 해전 중에도 장군은 일본의 주력무기인 조총과 조선의 승자총통을 접목하여 1593년 8월 새로운 정철총통을 제작
하는 등 계속적으로 신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장군의 창의력은 전쟁기간동안 군경영의 큰 자원이 되어주었다.
7년의 전쟁기간동안 장군은 수군의 의식주를 위한 군량확보, 무기제작과 훈련 등 군경영에 필요한 모든 재원을 거의 자력으로
해결 해야했다. 이를 위해 장군은 어로작업, 소금제조 및 판매, 둔전경영, 해로통행첩(선박운행증) 발행 등의 창의적인 여러
행정을 편다.
특히 과거 둔전관의 경험을 살린 둔전경영을 통해서는 군량미를 확보하는 동시에 유랑하는 백성들을 둔전 지역으로 모아 병력
충원을 효과적으로 해결하기도 하였다. 다음 글은 이순신 장군이 둔전경영을 건의하며 그 이로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군사들의 양식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중략) 관경 경영으로 경작하든지, 혹은 민간에 주어서 소작을 시키든지,
혹은 순천. 흥양의 수비군들로 하여금 전력하여 농사짓게 하다가 사변이 생길 적에는 나가 싸우게 한다면 싸움
에나 지킴에나 방해됨이 없고 군량에도 유익할 것입니다."
-조진수륙전사장. 1593.9.10
창의력은 약점을 강점으로, 위기를 기회로, 무에서 유로 변화시키는 힘이다. 이순신 장군은 이 창의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노력
하고 도전하여,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구해내고 나아가 동아시아의 평화를 지켜냄으로 세계 역사를 변화시키는 주인공이
되었다.
⊙ 불패의 해전사
이순신 장군은 첫 해전인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마지막 노량해전까지 7년의 임진왜란기간 동안 최소 23번의 해전을 치러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불패의 장수이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기록이다.
어떻게 이런 불패의 신화가 가능했을까?
철저한 준비
전라좌수사에 부임한 이순신 장군은 전쟁에 대비해 철저한 준비를 한다. 해전에 알맞은 방법을 개발하여 수군을 훈련시키고, 적의 장단점을 파악하여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는 무기를 제작한다. 화력이 우수한 조선의 지자. 현자 총통 및 판옥선과 거북선 등의 무기를 집중하여 제작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러한 철저한 준비 정신으로 장군은 매 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일본군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은 사상자를 기록할 수 있었다.
뛰어난 전략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꾸게 한 1592년 7월 8일의 한산도 해전은 세계 4대 해전으로 꼽힐 정도로 유명한 해전이다. 당시 70여척의 적선이 정박해 있던 견내량은 지형이 복잡하고 좁아서 아군에게 불리한 장소였다. 장군은 이 점을 간파하고 적선을 한산도의 넓은 바다로 유인하여, 무방비상태의 적을 "학익진법"으로 집중 공격함으로 대승을 거둔다. 한산도 해전은 뛰어난 전략가로써의 장군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 전투였다. 장군은 항상 부하장수들과 전략과 전술을 논의하고 연구하였다. 동서양의 해전 연구가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이러한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해전술을 칭찬하며 연구하고 있다.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함
철저한 준비를 바탕으로 전략을 수립하고 난 후 이순신 장군은 실제 전투에 누구보다 용감하게 최선을 다해 참여하였다 13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적선을 맞아 싸운 명량해전의 일화는 유명하다. 엄청난 적 앞에 조선수군의 장수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싸움을 망설이자, 장군은 부하장수들을 꾸짖으며 이들을 독려하기 위해 함대의 선두로 나아가 전투를 이끈다. 이러한 장군의 모습에 조선수군은 죽기를 각오하고 전투에 임하였으며 마침내 엄청난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이처럼 전투에서 항상 솔선수범하여 최선을 다하는 장군의 모습은 많은 부하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며, 그들 또한 장군처럼 전투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주었다. 이순신 장군은 해전에 임하기전 통찰력을 가지고 철저한 준비와 뛰어난 전략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제 전투에서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는 솔선수범을 보여줌으로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불패의 신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기록정신
기록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현재에 전해 줄뿐 아니라,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계획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때문에 올바른 역사기록을 남긴 인물들은 후대
사람들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선물을 하는 셈이다.
이순신 장군은 무관임에도 이러한 선물을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한 사람이다.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부터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직전 까지
약 7년간 진중에서 직접 일기를 기록하였다. 이렇게 기록된 난중일기와 임진왜란
해전상황을 아뢰는 장계초안인 임진장초는 유성룡의 징비록, 선조실록과 함께
임진왜란 3대 고전으로 알려져 있다.
사투를 넘나드는 전쟁 속에서 장수가 매일매일 일기를 쓰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놀라운 기록정신을 가진 장군은 이렇게 훌륭한 기록을 남겨
주었다.
난중일기에는 진중 일기답게 전라좌수영 및 통제영의 군영생활, 여러 해전의 군사전략과 해전상황기록, 당시 조선 사회의 모습
등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장군의 감정과 생각이 담백하게 기록되어 있어 인간 이순신의 사상과 면모를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는 최고의 자료가 되고 있다.
매년 1권씩 작성된 7권의 난중일기는 임진장초, 장군의 편지를 모은 서간첩과 함께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어 아산 현충사에 보관
되어 있다. 현대에도 이순신 장군의 문집은 다양하게 편집, 출판되어 장군을 연구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꾸준히
읽히고 있다.
⊙ 나라사랑, 백성사랑
32세에 무관의 길에 들어선 이순신 장군은 국토수호 및 나라사랑에 일생을 헌신하였다. 계급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변방의 작은 관직에 있을 때에도 맡은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였으며, 임진왜란 발발 이후에 는 조선 수군의 수장으로서 나라의 바다를 목숨걸고 지켜내었다.
무관으로써 장군의 나라사랑 길은 평탄치 않았다. 상관들의 모함으로 파직과 백의종군을 경험하기도 하였으며, 해전에서 연승하며 위기의 나라를 구해내는 큰 공을 세우지만, 죄인으로 몰려 처형 직전에 이르는 고난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힘든 시련 속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장군은 1598년 11월 퇴각하는 일본군을 맞아 노량해전 선상에서 전사하기까지 나라사랑을 굳건히 실천하였다.
이순신 장군의 굳은 나라사랑은 또한 백성사랑으로 이어진다.
일촉즉발의 긴장이 감도는 치열한 전쟁 속에서도 장군은 항상 백성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였으며,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진심으로 안타깝게 여기며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이러한 장군의 모습은 난중일기를 비롯한 여러 관련 기록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만일 왜선을 모두 불태워 왜적을 도망할 곳 없는 막다른 골목의 도적이 되게 한다면 숨이 있는 우리 백성들이 살육을 당할지도 모르므로 잠시 1리쯤 물러 나와 밤을 지냈다."
-견내량파왜병장, 7월17일
1592년 7월 이순신 장군은 역사적인 한산도 해전과 안골포해전에서 대승을 거둔다. 장군은 전투 중에 적선을 모두 파괴하지 않고 한 두 척을 남겨두는데, 이는 도망할 곳 없는 적들이 우리 백성들을 살육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이러한 장군의 모습은 이후에도 일관되게 여러 차례 목격된다.
다음은 명량해전을 앞둔 긴박한 상황 속에서 백성들을 먼저 안전하게 피난시키는 장군의 모습이다.
"전령선을 우수영으로 띄워 보내서 피난민들에게 어서 뭍으로 올라가도록 타이르라고 하였다."
-난중일기 1597.9.13
3일 후 조선수군은 13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적선과 맞서 싸우는 명량해전을 치르게 된다. 이 해전은 조선 수군의 재건, 나아가 나라의 존폐가 걸린 중요한 전투였다. 장군은 이렇게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도 백성을 먼저 생각한 것 이다. 이는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이었다.
이 후로도 이순신 장군은 갈 곳 없는 피난민들을 보호하고, 이들이 군의 보호 아래 어로와 농사를 통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보살피는 등 한결같은 마음으로 백성을 돌보았다.
이순신 장군의 나라사랑 길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장군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이러한 모든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돌보는 실천적인 나라사랑의 삶을 보여주었다.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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